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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제균]‘正義의 사람들’

입력 | 2012-03-30 03:00:00


박제균 정치부장

때는 1905년 2월 2일 밤. 모스크바엔 눈보라가 몰아쳤다.

한 대의 마차가 눈발을 가르며 크렘린 궁에서 볼쇼이 극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 안의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댄 이는 제정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모스크바 총독인 세르게이 대공(大公). 마차가 광장으로 꺾어질 무렵이었다. 시의회 건물 그림자에 몸을 숨겼던 한 남자가 거리를 가로질러 마차를 향해 달렸다. 손을 들어 폭탄을 던지려던 순간 흠칫 놀란 남자는 그대로 물러서고 만다. 그는 왜 절체절명의 순간에 뒷걸음질쳤을까?

남자가 폭탄을 거둔 까닭은…

남자가 본 건 마차에 함께 탄 대공의 어린 조카 2명이었다. 어린아이들을 보고 놀라서 폭탄을 거둔 남자는 사회혁명당 소속의 전투대원 이반 칼리아예프(당시 28세)였다. 그의 ‘테러리스트답지 못한 머뭇거림’은 이후 숱한 논란을 낳았다. 프랑스 지성 알베르 카뮈는 이를 모티브 삼아 희곡 ‘정의의 사람들(Les Justes·1950)’을 썼다. 희곡에는 칼리아예프가 ‘거사’에 실패하고 아지트로 돌아온 뒤 동지들이 벌인 논쟁이 재구성돼 있다.

스테판: 두 달 동안이나 끔찍한 위험 속에서 별일을 다 겪었는데 날려 보내다니…. 그러고 나서 다시 시작한다고?

도라: 만약에 우리가 던진 폭탄에 어린애들이 산산조각 난다면, 그때야말로 조직의 권위도 영향력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마는 거야.

스테판: 그런 애들 문제 따위를 잊어버리기로 굳게 마음먹을 때, 바로 그날부터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되고, 혁명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거야.

도라: 그날이야말로 혁명이 증오의 대상이 되는 날이지.

스테판: 너희가 진정 혁명을 믿는다면, 그까짓 어린애 둘쯤 죽는 것이 뭐 그리 큰 문제가 된단 말인가.

칼리아예프를 비난하는 스테판과 옹호하는 도라. 둘의 논쟁은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할 수 있느냐’는 철학적 논제를 던진다. 결국 ‘혁명도 삶을 위한 것’이라고 외치는 칼리아예프는 이틀 뒤 세르게이 대공 암살에 성공한 뒤 처형된다.

서론이 길었지만, 불현듯 1980년대 대학 시절에 접한 칼리아예프의 실화를 떠올리고 카뮈의 희곡을 다시 꺼내든 이유가 있다.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으로 알려진 통합진보당 내 주류세력의 행태 때문이다. 경선 여론조사 조작을 한 것도 모자라 ‘얼굴’인 이정희 공동대표가 사퇴 압력에 몰리자 ‘몸통’인 이상규 후보를 대타로 내세웠다. 다른 자파 후보가 성추행으로 낙마하자 역시 자파 소속으로 ‘돌려막기’도 했다. 이 세력은 또 2000년 이후 당내 선거에서 자파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위장전입 흑색선전 문서위조 등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자칫 주사파가 19대 국회 좌우

세력 확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의 행태는 ‘혁명이란 목적이 모든 수단을 합리화한다’는 극중 인물 스테판의 논리와 놀랍게 닮았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카뮈는 스테판이란 인물을 통해 마르크시즘의 전체주의 성향을 경고하고 있다. 실제 카뮈는 좌파였음에도 이 희곡을 발표한 이듬해부터 스탈린 체제를 옹호한 사르트르와 사실상 결별했다.

결국 공산주의는 전체주의가 초래한 비능률 때문에 망했다. 오직 한반도 북쪽에서만 공산주의의 변종(變種)인 주체사상으로 갈아탄 체제가 연명해오고 있다. 따라서 주체사상의 세례를 듬뿍 받은 통진당 주류 주사파 세력이 국회의사당 내 최루탄 투척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현재 선거구도라면 통진당이 19대 국회 때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사이에서 ‘캐스팅보트’를 쥘 공산이 크다는 점. 자칫 주사파 세력이 대한민국 국회를 좌지우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득해진다.

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