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하남 구산성지 11년째 디자인하는 정종득 신부
정 신부는 “내 마지막 꿈은 선조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재현한 작은 마을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새우젓 팔던 신자들 형상화한 항아리
“이 도자기 디자인은 ‘천주성교일과(天主聖敎日課)’라는 한문 기도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A4 용지 크기의 노트를 넘기자 나타난 그림. 십자가 위에 다섯 개의 동그라미가 놓여 있고, 원 안에는 ‘용덕(勇德)’ ‘근덕(勤德)’ 등 다섯 가지 덕이 적혀 있었다. 오래된 좋은 습관을 뜻하는 ‘덕’이라는 글자에 기도서에 등장하는 가르침을 결합했다. 5란 숫자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과 함께 예수님이 피를 흘렸던 다섯 가지 상처를 상징한다.
구산성지 곳곳에는 동그랗고 파란 도자기를 얹어놓은 회색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저것들은 새우젓 장사꾼들을 형상화한 거예요.”
약 100년 동안 이어졌던 천주교 박해 기간(1780년대∼1890년대) 동안 경인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새우젓 파는 사람이 많았다. 감시의 눈길을 피해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박해 속에서 신음했던 선조들의 신앙생활을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죠. 그분들의 행적이나 기록도 많이 사라졌고요. 그런 모습들을 다시 재현하고 싶은 거예요. 직접 만들지는 않았고, 디자인만 제가 했어요.”
2만6400m²(약 8000평)에 달하는 구산성지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조형물들에는 저마다 그의 숨겨진 뜻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12년 전 처음 그가 이곳에 왔을 때의 성지는 지금과 모습이 많이 달랐다. “주변의 상추밭들 때문에 파리가 많아 난지도에 온 줄 알았어요.”
○ 뿌리와 정신이 담긴 디자인
놀랍게도 그는 단 한 번도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딱히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교구청에서 교육 담당 차장을 하며 어떻게 하면 신자들을 더 잘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뿐이다. 좀 더 보기 좋고 이해하기 쉬운 교리, 교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던 최덕기 주교가 성지 담당 신부 자리를 추천했다. 정 신부는 일반 신도들이 순교자들의 향취를 듬뿍 느끼고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 디자인을 시작했고, 성지를 꾸며 나갔다. 1998년부터 5년 동안 매주 월요일이면 유명 사찰을 비롯한 유적지를 찾아 다녔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우리나라에도 좋은 옛 문화가 많잖아요. 문화라는 것이 사실은 삶의 총체적인 양식인데, 그런 것들이 많이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깝기도 했어요. 후손들에게 옛 문화를 전달해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구산성지 성모상 뒤쪽으로 마련된 큰 공터에는 12사도를 담은 우리 전통 솟대가 솟아 있고, 성당 내부도 앉아서 미사를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성당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붉은색 벽돌들은 그가 성지 안쪽에 있는 가마터에서 직접 구웠다.
“전통적인 것을 가져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옛 사람들도 절대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그 절대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몰랐던 것이고, 신부인 저에게는 그 절대자가 하느님이신 거죠.”
성당 창문들도 하나도 같은 모습이 없었다. 육모 방망이, 붉은색 포승줄, 철편 등이 액자 역할을 하는 큰 창문틀 안에 들어 있었다. 박해를 받았던 시절 신자들에게 사용됐던 형구(形具)들이다. 성지 안에 그가 감춰둔 비밀들이 실타래처럼 하나둘씩 풀려나갔다.
“교회사를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으니까 디자인도 그런 의미들을 담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뿌리나 정신이 없는 디자인은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데 원래 이게 신부의 본업은 아니라서…. 이제 디자인은 그만하고 올해부터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죠. 하지만 이게, 디자인이 재미나요. 허허.”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