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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입력 | 2012-03-31 03:00:00


《 ‘어떤 때는 죽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파리에 가서 살고 싶기도 해.’

-‘보바리 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
“쇼핑중독은, 정신적인 병이고 치료해야 해요.”

정신과 의사는 진단을 내렸다.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병인가요.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쇼핑의 취향은 곧 정체성이 아닐까요. 후에 다시 만난 그 의사는 “쇼퍼홀릭에 대한 주장에 일리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이라고 관대한 유보를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충격을 받은 뒤였다. 쇼핑중독이 TV 시사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누가 내게 “그 가방 새로 샀어?”라고 물으면 “아니. 꽤―사실 이틀 전―됐어”라며 휙 던지곤 했다. 정말로 나는 병들었나. 주변의 수많은 쇼퍼홀릭도 환자인가. 돈 모으는 요령 따위 구두 상자에 넣어둔 것이 죄일까.

세기 말, 우울한 자가진단에서 벗어나게 해준 쇼퍼홀릭들이 등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쇼퍼홀릭은 TV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일 거다. 1998년 첫 시즌을 시작한 이 미드 주인공은 “뉴요커라면 강도를 만나도 하이힐을 먼저 챙기는 ‘슈어홀릭(shoeaholic)’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다가 ‘홀릭’이란 말을 ‘머스트해브(must have·사야 한다)’란 단어가 밀어냈다. 쇼핑은 병이 아니라 현대인의 의무가 된 것이다.

젊은 프리랜서가 100만 원 넘는 마놀로 블라닉 힐을 시즌마다 쇼핑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게 했던 미국 경제가 월스트리트를 파멸 지경으로 만들면서 쇠락해 그 빛이 바래긴 했어도, ‘섹스 앤드 더 시티’의 대사 한 줄 한 줄은 스타일이라는 신흥종교의 복음이 됐다. 이후 로맨틱 영화의 여주인공은 쇼퍼홀릭이고, 남자 주인공은 플래티넘 카드 소지자였다.

그렇다면 근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쇼퍼홀릭은 누구일까. 마리 앙투아네트? 국고가 거덜 나도 왕비가 쇼핑 때문에 자기 인생의 뭔가를 희생한 적은 없다. 19세기 중반, 외상과 사채로 진 빚을 ‘돌려 막기’ 하다 결국 자살한 진정한 쇼퍼홀릭이 나타났으니 바로 보바리 부인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는 보바리 부인이 불륜 끝에 파멸에 이른다는 줄거리로 요약된다. 프랑스 철학자 쥘 드 고티에가 ‘보바리즘’이란 말을 써서 이상적인 자아니, (성적·性的) 불만족이니 하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그의 쇼핑 행각은 묻혀버렸지만, 보바리 부인은 당대의 ‘패션 빅팀(fashion victim·과도하게 신상품을 추구하다 패션의 제물이 되는 사람)’이자 쇼퍼홀릭이었다.

시골에 살던 보바리 부인의 욕망이 구체화한 건 귀족 파티에 다녀오면서다. 그녀는 패션잡지를 정기구독하며 최신 유행을 파악하고, 파리의 부티크 개점 소식까지 열독한다. ‘파리(Paris)’라는 소리가 그녀 귀에는 성당 종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시골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자 보바리 부인은 병을 앓는다. 첫 번째 징후.

“어떤 때는 죽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파리에 가서 살고 싶기도 했다.”

모든 쇼퍼홀릭들이 주기적으로 앓는 병이다. 보바리 부인은 방문판매업자 뢰르를 통해 옷과 구두를 사들이고 남자들에게 값비싼 말채찍(에르메스였을까)이나 스카프를 선물한다. 외상에 사채까지 해주던 뢰르는 결국 보바리 부부의 전 재산을 ‘합법적으로’ 가로챈다. 플로베르는 뢰르 같은 장사꾼을 경멸했지만, 그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되리라고 예언한다.

월급쟁이 ‘된장녀’들이 평생 할부로 명품백을 사기 때문에 무역적자가 심화된다고 고발하는 TV프로처럼, 귀족을 흉내 내는 부르주아들의 행태를 보여주는 소설이 ‘마담 보바리’다. 지금 내 주변엔 수많은 보바리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열정적으로 일하고, 자신에게 아름다운 백을 선물하는 해피엔딩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을 위해 현대의 뢰르들은 아웃렛도 만들고, 콜래보레이션(콜래보)이란 이름으로 저가품도 판다. 최근 한 명품 브랜드가 콜래보로 한정판 저가 상품을 내놓았을 때 전 세계 보바리들은 오전 3시부터 줄을 섰다. 그들은 건강해보였다. 덕분에 내가 사고 싶었던 물방울무늬 재킷의 실물은 구경도 못해봤지만 말이다.

消波忽溺 holden@donga.com  

消波忽溺
만국의 쇼퍼홀릭에게 애정을 느끼며 패션과 취향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