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치부 기자
공천은 국회의원들에게 목숨이나 다름없다. 공천에서 탈락한 뒤 ‘낙천 공황장애’를 앓는 현역 의원들도 유사한 단계를 거친다. 부인과 분노의 과정을 거쳐 신당을 만들지, 무소속 연대를 이룰지 협상에 들어갔던 새누리당 낙천 의원들은 김무성 의원이 일찍이 ‘죽음’을 수용하자 대부분 그의 길을 따랐다.
얼마 전 만난 신지호 의원도 그랬다. 공천 결과에 누구보다 분노했던 그는 어느새 농담을 건넬 정도로 여유를 찾았다. 그는 대뜸 “2년 전 이미 낙천이 확정됐다”며 웃었다. 2010년 6월 여야는 세종시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쳤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5년 만에 단상에 올라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할 때 뒤이어 나온 신 의원은 찬성 토론을 했다. 그때 이미 박 위원장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그의 ‘자학개그’는 절망에서 수용으로 넘어가는 단계처럼 보였다.
그에게 4년간의 의정활동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물었다. “저쪽은 서로를 감싸는데 이쪽은 그게 없어. 곽노현과 조전혁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 곽 서울시교육감은 후보자 매수 혐의로 기소됐지만 ‘저쪽’은 비난은커녕 오히려 그를 감싸고돌았다. 반면 조 의원이 전교조에 맞서 빈털터리가 될 때 ‘이쪽’은 어떠했느냐는 얘기다. 탄식은 걱정으로 이어졌다. 정체성이 공천의 제1기준인 저쪽은 19대 국회가 시작되면 ‘누가 더 MB에 대한 증오심이 큰지’ 선명성 경쟁에 나설 태세다. 과연 이쪽에선 누가 전사로 나설까.
신 의원은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음주방송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조 의원은 전교조 명단을 공개해 법원의 판결을 따르지 않은 전력이 있다. 그들의 허물을 덮어줄 마음이 없는 이쪽은 전사 둘을 잃었다.
하지만 연어가 아니고선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스를 순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새누리당은 변해야 했다. 14년 만에 당명을 바꿨다. 당의 헌법인 정강을 송두리째 뜯어고쳤다. ‘레드 콤플렉스’ 탓에 좌파조차 사용을 꺼리는 빨간색을 당의 상징색으로 내세웠다. 민정당 창당 이후 파란색을 버린 게 31년 만이다. 이렇게 싹 바꿨으니 새누리당 현역 의원의 46%가 물갈이 된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진짜 놀랄 일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꾼 새누리당이 선거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킨 첫날 있었다. 박 위원장의 오른쪽에는 서청원, 왼쪽에는 김용환 고문이 섰다. 그들은 박 위원장의 오랜 멘토이다. 박 위원장이 최근까지 ‘이재오 의원이 탈당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등 온갖 고민을 털어놓고 마음을 나눈 사람은 김종인 씨다. 다 바뀌었는데 ‘박근혜의 남자들’만 여전히 ‘올드보이’다.
박 위원장은 전국을 누비며 호소한다. 4·11총선은 ‘과거로의 회귀냐, 미래로의 전진이냐’의 선택이라고. 유권자들에 앞서 박 위원장이 먼저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이재명 정치부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