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과잉보호 받으며 자란 ‘초식학생’지시 받아야 마음 편하고 창의성은 떨어져
최근에는 새학기를 맞아 사물함 정리를 시키자 한 남학생이 H 교사를 찾아왔다. 이 학생은 “선생님 국어책을 밑에 놓을까요? 수학책을 밑에 놓을까요?”라고 물었다. ‘리코더와 물휴지는 왼쪽과 오른쪽 중 어디에 놓을지’ ‘책은 크기별로 정리해야 하는지’까지도 하나하나 정해달라고 했다.
H 교사는 “숙제를 모아서 교탁 위에 올려놓으라고 하면 굳이 어느 위치에 올려놓아야 하는지도 물어 본다”고 말했다.
최근 초등학교에서 다른 사람이 할 일을 정해주지 않으면 학습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른바 ‘초식학생’이 늘었다. 초식학생은 지시를 받는 데 익숙해 누군가가 자신이 할 일을 정해주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학생을 뜻하는 신조어.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건의하는 일은 거의 없고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일을 진행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낀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초등생의 특성상 어느 정도 의존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최근엔 고학년에서도 정도가 지나친 학생이 부쩍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 안산지역의 초등학교 P 교사는 “고학년 학생도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도 되느냐’고 물어보거나 학교수업을 마치면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은 뭘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면서 “평소 장난꾸러기인 학생도 수시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인받으려 한다”고 말했다.
초식학생이 부쩍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저출산이 일반화되면서 대게 한 명밖에 없는 자녀에게 모든 관심을 쏟아 부으며 과잉보호를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휴대전화의 보급은 이런 현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한 반에 휴대전화를 가진 초등생이 3분의 1 정도였지만 요즘은 거의 모두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이젠 전업주부가 아닌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도 언제, 어디서나 휴대전화로 자녀가 정해진 일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관리할 수 있게 된 것. 초등생들도 수시로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할 일을 묻거나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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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로 내준 숙제도 부모가 대신… 창의적 활동엔 땀 뻘뻘
초식학생들은 특히 창의적인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맡은 P 교사. 그는 최근 미술시간에 직접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든 뒤 그 캐릭터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수업을 진행했지만 곧 어려움에 부닥쳤다. 많은 학생이 유명 게임 캐릭터인 ‘앵그리버드’처럼 기존 만화의 내용을 그대로 베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일부 부모는 학습 외적인 영역까지 자녀의 일을 대신해주기까지 한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6학년의 한 반에서는 한 학생이 욕을 해서 교사가 ‘벌 숙제’를 내줬다. 말의 소중함이란 의미를 담은 어린이용 명심보감 내용을 옮겨 적는 과제를 준 것.
하지만 교사가 숙제의 필체를 확인하니 아이가 아닌 어른이었다. 확인을 해보니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면서 대신 써준 것이었다. 또 다른 서울지역의 초등학교에서는 하루 동안 감사한 일을 세 가지씩 적는 과제를 내주자 이 내용까지도 부모가 대신 써주기도 했다.
서울 강북지역의 초등학교 P 교사는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게 하면 수업시간 안에 스스로 완성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면서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가야 하니 숙제는 부모가 대신 해준다’고 생각하며 버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 과잉보호 초식학생… “중학 고학년부터 성적 떨어질 가능성 높다”
부모가 자신의 일을 대신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초등생도 생겨난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은 6학년 학생이 수업시간이 끝나고 어머니에게 휴대전화로 전화를 하더니 ‘엄마가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아서 혼났다’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이 학생을 지도한 P 교사는 “부모가 하나하나 챙겨주는 학생은 점차 당연히 자신이 할 일도 부모가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다”고 말했다.
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은 “부모가 모든 걸 해주는 학생은 사고력, 계획성, 문제해결 능력 등 인간의 고차원적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전두엽이 발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초등학교 때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만 학습량이 늘어나고 더 높은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중학교 고학년 이후에는 성적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초식학생 ::
누군가가 자신이 할 일을 정해주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학생을 뜻하는 신조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며 온순한 초식동물처럼 수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주로 부모의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 학생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이태윤 기자 wol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