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결혼 60주년을 맞는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한다. 열심히 살았고, 특별히 아쉬운 건 없다. 다만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좀 더 하고 싶다. 그리고 어머니가 덧붙인 건 “연애를 해보고 싶다”였다. 그 시절 대부분의 여인들처럼 얼굴 한 번 보고 결혼하셨으니 그럴 법하다 싶었으며 여든에도 여전히 여자는 여자인 것인가, 애틋한 느낌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도 이 글을 읽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내 생애 늦은 어느 시기, 모든 감성이 사라졌다 믿은 때에 열렬한, 뜨거운 사랑을 해보는 것? 나쁘지 않겠으나 역시 좀 성가실 것 같다. 이쯤 되면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사는, 행복한 사람인가.
마당 있는 집. 리스트에 적고 싶은 두 번째 사항이다. 꼭 넓어야 하는 건 아니다. 감나무, 석류나무, 개암나무 각각 한 그루, 그리고 일년초 꽃모종을 심을 수 있으면 족하다. 욕심을 낸다면 나무 그네를 놓을 수 있는 공간 정도. 마당 있는 집과 입양은 사실 상호 보족적인 것이다. 손에 흙을 묻히며 아이들과 나는 작은 꽃을 심는다. 감 하나를 따서 나누고 잘 익은 개암은 항아리에 재어 두고 겨우내 퍼먹을 것이며 붉은 석류 알갱이를 한 옴큼씩 서로의 입에 넣어주고 그 신맛에 눈을 찡그리다 웃음을 터뜨리고…. 그때쯤이면 내 머리는 희게 변해 있을지도 모르고 위 두 아이의 아이들이 서로 그네를 타겠노라며 다툴 수도 있겠다. 오, 생각만으로도 흐뭇하다.
주저하며 쓰는 세 번째 희망사항.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게으름을 피우며 일 년만 살았으면 싶은 것. 종일 가만히 앉아 햇살을 받다 지는 해를 보고 방으로 들어와 잠이 드는 생활, 무채색의 헐렁한 옷을 입고 달지 않고 짜지 않은 음식을 끓여 먹고 아는 이 없는 길을 그저 걷다 돌아와 꿈조차 꾸지 않는 잠을 잘 수 있을 날들….
산 깊은 절, 외딴섬, 어디라도 좋다. 알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스페인의 낯선 마을이면 기쁘겠다. 언젠가 어느 여성 작가가 말했던 그리스의 바닷가, 마치 신화 속 인물들인 양 아름답고 순한 사람들이 산다는 그런 곳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곳에서 나는 어쭙잖은 나를 내려놓고 철든 이후 나를 온통 둘러싼 허영과 관념을 벗어놓고 내 속에 웅크린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켜켜이 끼어있는 내 안의 모든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상처가 드러나고,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마당 있는 집을 짓고 아이를 입양하고, 그리고 훌쩍 떠나기.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욕망을 벗고 싶다 말하면서도 여전히 욕망에 시달리는, 영원히 꿈을 꾸듯 살고 있는 어린아이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