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 논설위원
‘경제프리즘’ 통해 YH사건 다시 보니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YH사건은 청년시절 내 눈에 ‘불쌍한 노동자 vs 나쁜 회사’라는 단순구도였다. 하지만 ‘경제라는 프리즘’으로 사건의 기록을 보면 좀 복잡해진다. YH무역의 창업자는 장용호 씨다. 1965년 KOTRA 뉴욕무역관의 부관장이던 36세의 장 씨는 국산 가발이 미국에서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보고 사표를 낸 후 YH무역을 세운다. 자본금 100만 원으로 서울 왕십리의 콩나물 공장을 빌려 시작해 1969년 면목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수출순위 15위,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로 급성장했다. 1970년엔 김우중 구자경 신현확 씨와 함께 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는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자본 재분배에 기여하는 기업을 지향한다”고 공언했다. 요샛말로 ‘개념 기업인’이었던 셈. 그러나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 수요가 줄고 후발개도국의 추격이 거세지면서 회사가 급격히 기울었다. 직원 수를 줄였지만 회생 가능성은 낮았고 노조의 반발이 반복되면서 폐업 선언에 이른다. 그러자 노조원들이 신민당사 농성을 한 것이다.
몇 년 후인 1983년 이 자리에 ‘서울기독병원’이 들어서 한동안 지역 중견병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중규모 종합병원들이 일제히 경영난에 빠질 때 이 병원은 노사 갈등까지 덤으로 겪었다. 노조는 병원장을 임금체불로 고소했고 병원은 직장폐쇄했다. 결국 문을 닫았다.
작년 한진중공업 분규가 터지자 YH사건 등이 다시 오버랩됐다. 한진중은 독(dock)이 300m×50m 크기로 작아 수요가 몰리는 초대형 상선을 짓지 못한다. 세계 금융위기까지 겹쳐 2009년 9월 이후 수주가 1건도 없다. 견디다 못한 회사는 2010년 12월 정리해고를 했다. 이에 노조가 파업을 하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찾아와 크레인에 올라갔다. 반년 만에 노사협상이 타결됐지만 김 씨는 내려오지 않았다.
한진, 高부가 특수선으로 回生하길
대다수 노조원들의 농성중단 호소도 먹히지 않았고 대신 멀리서 ‘희망버스’가 오기 시작했다. 파업 여파로 배 7척은 납기일을 어겨 수백억 원의 위약금을 물었다. 건조납기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수주의향서를 받아둔 4척의 본계약도 무산됐다.
작년 11월 정치권의 압박으로 회사는 민주노총의 요구를 들어줬다.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 씨는 투쟁 영웅이 돼 MBC 등 파업현장에 강연을 다닌다. 그러나 할 일이 없는 한진중 근로자들은 700명 중 520명이 출근하지 않는다. 올 11월 해고자 94명이 복직하면 더 낭패다. 회사는 ‘독은 작지만 기술력이 있으므로 쇄빙선 잠수지원선 군함 등 고부가 특수선에 주력한다’는 전략이다. 방향은 바로 잡은 것 같은데 통할지는 미지수다. 너무 상처가 크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근로자들이 온건노조를 새로 만들었고 80%가 옮겨갔다. 호된 경험을 했지만 YH나 기독병원이 간 길에서는 한발 벗어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