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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내 인생을 바꾼 그것]허재 감독과 술

입력 | 2012-04-07 03:00:00

벗 찾아, 낭만 찾아 술과 열애 30년… 빅게임 앞두곤 절대금주




허재 감독에게 물었다. 10년 뒤에도 술을 마실 거냐고.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일모레 오십인데 나이가 들면 버티겠느냐”고 했다.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허 감독은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 ‘안 마시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햇볕이 내리쪼였다. 찌는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무거워서일까. 아직 여드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대학생 허재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시끌벅적한 식당에 도착하니 구석 자리에 아버지가 있었다.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눈치만 살피게 됐다. 묵직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리 앉아 보거라.” ‘얼마나 혼을 내려고 저러실까.’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가앉았다. 의외로 빈 소주잔이 다가왔다. 말없이 잔을 내민 아버지는 술을 따라줬다.
“술 마시는 건 괜찮다. 근데 마시려면 제대로 마셔라. 왜 네 돈 주고 마시는데 안 좋은 소문이 들리는 게냐.” 》
○ 20대, 혈기로 마시다

아버지는 이미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감독님 없을 때 몰래 훈련장을 빠져나와 술 한잔 걸친 ‘1급 비밀’까지. 그냥 모른 척 해왔는데 다소 과격한 아들의 술버릇 때문에 여기저기서 말이 들리니 화가 나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잔소리. “술은 기분 좋을 때까지만 마시는 거다. 술자리에선 매너가 중요하다….”

사실 허재는 그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냥 크게 혼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투덜댔다. ‘술이란 게 내 기분 좋으라고 마시는 건데 다른 사람 눈치까지 봐야 하나. 또 마시다 보면 좀 많이 마실 수도 있지.’

허재(47)가 술잔에 처음 입을 댄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농구부엔 몇 년씩 유급한 선배들이 꽤 됐다. 그 선배들이 졸업할 때쯤 후배들을 체육관에 불렀다. 소주를 사발에 부어줬다.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 맛은 썼고, 목은 탔다. 그렇다고 하늘보다 높은 선배들이 주는 술을 안 마실 수도 없는 터. 어지러움을 참아가며 집에 가는 길에 그는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했다. 첫 음주의 기억은 말 그대로 쓰디썼다.

중앙대에 진학한 허재는 얼마 안 돼 대학 무대를 평정했다. 국가대표로도 꾸준히 발탁됐다. 그러다 보니 대학 시절 대부분을 농구부 합숙소와 대표팀 선수촌에서만 지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지극정성으로 끓여준 뱀탕 때문일까. 유독 혈기 넘치는 그에게 반복되는 일상은 답답하고 지루했다. 그래서 외박이 주어지는 토요일만 되면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다 보니 간혹 옆 사람과 시비가 붙었고, 그런 그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또 한 번 마시면 끝을 봤다. 젊은 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량에서도 지는 걸 못 참는, 불같은 승부욕 때문이었다.

○ 30대, 사람이 좋아서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를 두고 실업팀 사이에선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큰 고민은 없었다. 돈보다 의리를 선택해 기아에 가기로 결정했다.

긴장될 법한 실업 데뷔전. 그는 27득점, 18리바운드란 괴물 같은 성적을 냈다. 이후 ‘농구 대통령’이란 찬사를 받으며 입단 후 8시즌 동안 7번의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쥐었다.

실업팀에서도 그의 애주(愛酒)는 계속됐다. 훈련이 끝나면 습관처럼 술을 마시러 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하지만 마시는 이유는 대학 시절의 그것과 좀 달랐다. 예전엔 합숙생활의 스트레스와 경기의 긴장감을 날려버리기 위해 술을 마셨다면, 이젠 좀 더 여유 있게 술맛을 즐기게 됐다. 또 술자리에서 만나는 사람이 좋았다. 허심탄회하게 잔을 기울일 때 느껴지는 정이 좋아 술친구를 찾았다.

‘조만간 술 한잔 하자.’ 다른 사람들에겐 지나가는 말로 하는 인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허재는 진심이었다. 사람이 좋아 그렇게 말했고, 그런 말을 건넨 사람과는 대부분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술 때문에 생긴 지우고 싶은 기억도 많았다. 특히 1996년은 시련의 한 해였다. 애틀랜타 올림픽 때 현주엽의 생일 파티를 해준다고 몇몇 선수와 술잔을 기울인 게 사단이었다. 당시 농구팀이 연패에 빠져 있던 데다 우리 선수단의 성적이 예상보다 안 나오던 상황이라 비난이 더욱 거셌다. 특히 화려한 음주 전력이 있던 ‘악동’ 허재에게 그 비난이 집중됐다.

그해 11월엔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이 확정되면서 국가대표 자격까지 잃었다. ‘허재=술’이란 공식은 이후에도 꾸준히 유효했다. 경기 전날 술을 많이 마신 허재 때문에 수비수가 술 냄새에 취해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두주불사 허재에게도 원칙은 있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곤 절대 술에 입을 대지 않았다. 현대, 삼성 등 라이벌을 만나면 술집 대신 코트에 남아 만족할 때까지 슛 감각을 조율했다. 정상적인 몸 상태에서 조금만 궤도가 벗어나도 자체 금주령을 발동할 만큼 컨디션 관리에 철저한 독종, 그게 허재였다.

○ 40대, 팍팍한 삶의 여유를 좇아서


실업, 프로팀을 거쳐 2004년 은퇴를 발표한 허재는 이듬해인 2005년부터 지금까지 KCC 감독을 맡고 있다.

세월엔 장사가 없다고 하던가. 술을 마시면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가끔 기울이는 술잔은 냉혹한 프로세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몇 안 되는 탈출구다. 가장 가까운 술친구는 역시 같은 팀 코치진. 시즌이 시작되면

5개월 넘게 같이 지내다 보니 아내보다 더 가까운 게 그들이다.

보통 프로농구 감독들은 홈경기가 있을 때면 경기 전날 원정팀 감독을 불러 술잔을 기울인다. 서로 경쟁자 관계지만 비슷한 고민을 안고 서로 이해하는 사람들이라 그럴까. 경기 얘기만 꺼내지 않는다면 어느 때보다 편하고 또 좋은 게 그들과의 술자리다. 특히 허 감독은 선수 시절 오랜 기간 동고동락한 강동희 감독(동부)과 자주 자리를 만든다. 술은 누가 더 세냐고? 승자도 패자도 없다. 둘 다 술이 세 잘 취하지 않아서다.

8년차 지도자인 허 감독. 그가 선수 시절엔 선수들의 음주 문제를 관리하는 게 감독의 중요한 업무였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회식을 가도 술 대신 사이다를 마시는 게 요즘 선수들이다. 프로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거야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때론 씁쓸하다. 낭만이 사라졌다. 예전엔 선배가 후배들에게 얼차려를 준 후 미안해서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맞을 땐 그렇게 미워도 술 한잔하면 선배의 따뜻한 한마디에 후배들이 감동의 눈빛을 보내던 시절. 이젠 선수들 사이에 그런 얼차려도, 술자리도 거의 없다. 훈련 끝나면 모두 바로 사라진다. 선수들 사이의 끈끈함이나 팀워크도 많이 줄었다. 허 감독은 그게 아쉽다.

그의 장남 허웅(19)이 올해 연세대에 진학했다. 농구 선배로서 성인이 된 아들에게 조언 하나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술은 마셔도 되는데 너무 많이 마시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술자리에선 항상 매너를 지키고….” 어디선가 들어본 말. 아들은 이 충고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쨌든 아버지 마음은 다 같은 듯하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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