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 찾아, 낭만 찾아 술과 열애 30년… 빅게임 앞두곤 절대금주
허재 감독에게 물었다. 10년 뒤에도 술을 마실 거냐고.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내일모레 오십인데 나이가 들면 버티겠느냐”고 했다.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허 감독은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 ‘안 마시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술 마시는 건 괜찮다. 근데 마시려면 제대로 마셔라. 왜 네 돈 주고 마시는데 안 좋은 소문이 들리는 게냐.” 》
○ 20대, 혈기로 마시다
아버지는 이미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감독님 없을 때 몰래 훈련장을 빠져나와 술 한잔 걸친 ‘1급 비밀’까지. 그냥 모른 척 해왔는데 다소 과격한 아들의 술버릇 때문에 여기저기서 말이 들리니 화가 나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잔소리. “술은 기분 좋을 때까지만 마시는 거다. 술자리에선 매너가 중요하다….”
사실 허재는 그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냥 크게 혼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투덜댔다. ‘술이란 게 내 기분 좋으라고 마시는 건데 다른 사람 눈치까지 봐야 하나. 또 마시다 보면 좀 많이 마실 수도 있지.’
허재(47)가 술잔에 처음 입을 댄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농구부엔 몇 년씩 유급한 선배들이 꽤 됐다. 그 선배들이 졸업할 때쯤 후배들을 체육관에 불렀다. 소주를 사발에 부어줬다. 안주도 없이 마시는 술. 맛은 썼고, 목은 탔다. 그렇다고 하늘보다 높은 선배들이 주는 술을 안 마실 수도 없는 터. 어지러움을 참아가며 집에 가는 길에 그는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했다. 첫 음주의 기억은 말 그대로 쓰디썼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지극정성으로 끓여준 뱀탕 때문일까. 유독 혈기 넘치는 그에게 반복되는 일상은 답답하고 지루했다. 그래서 외박이 주어지는 토요일만 되면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다 보니 간혹 옆 사람과 시비가 붙었고, 그런 그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또 한 번 마시면 끝을 봤다. 젊은 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량에서도 지는 걸 못 참는, 불같은 승부욕 때문이었다.
○ 30대, 사람이 좋아서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를 두고 실업팀 사이에선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큰 고민은 없었다. 돈보다 의리를 선택해 기아에 가기로 결정했다.
긴장될 법한 실업 데뷔전. 그는 27득점, 18리바운드란 괴물 같은 성적을 냈다. 이후 ‘농구 대통령’이란 찬사를 받으며 입단 후 8시즌 동안 7번의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쥐었다.
실업팀에서도 그의 애주(愛酒)는 계속됐다. 훈련이 끝나면 습관처럼 술을 마시러 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조만간 술 한잔 하자.’ 다른 사람들에겐 지나가는 말로 하는 인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허재는 진심이었다. 사람이 좋아 그렇게 말했고, 그런 말을 건넨 사람과는 대부분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술 때문에 생긴 지우고 싶은 기억도 많았다. 특히 1996년은 시련의 한 해였다. 애틀랜타 올림픽 때 현주엽의 생일 파티를 해준다고 몇몇 선수와 술잔을 기울인 게 사단이었다. 당시 농구팀이 연패에 빠져 있던 데다 우리 선수단의 성적이 예상보다 안 나오던 상황이라 비난이 더욱 거셌다. 특히 화려한 음주 전력이 있던 ‘악동’ 허재에게 그 비난이 집중됐다.
그해 11월엔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이 확정되면서 국가대표 자격까지 잃었다. ‘허재=술’이란 공식은 이후에도 꾸준히 유효했다. 경기 전날 술을 많이 마신 허재 때문에 수비수가 술 냄새에 취해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두주불사 허재에게도 원칙은 있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곤 절대 술에 입을 대지 않았다. 현대, 삼성 등 라이벌을 만나면 술집 대신 코트에 남아 만족할 때까지 슛 감각을 조율했다. 정상적인 몸 상태에서 조금만 궤도가 벗어나도 자체 금주령을 발동할 만큼 컨디션 관리에 철저한 독종, 그게 허재였다.
○ 40대, 팍팍한 삶의 여유를 좇아서
세월엔 장사가 없다고 하던가. 술을 마시면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그래도 가끔 기울이는 술잔은 냉혹한 프로세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몇 안 되는 탈출구다. 가장 가까운 술친구는 역시 같은 팀 코치진. 시즌이 시작되면
5개월 넘게 같이 지내다 보니 아내보다 더 가까운 게 그들이다.
보통 프로농구 감독들은 홈경기가 있을 때면 경기 전날 원정팀 감독을 불러 술잔을 기울인다. 서로 경쟁자 관계지만 비슷한 고민을 안고 서로 이해하는 사람들이라 그럴까. 경기 얘기만 꺼내지 않는다면 어느 때보다 편하고 또 좋은 게 그들과의 술자리다. 특히 허 감독은 선수 시절 오랜 기간 동고동락한 강동희 감독(동부)과 자주 자리를 만든다. 술은 누가 더 세냐고? 승자도 패자도 없다. 둘 다 술이 세 잘 취하지 않아서다.
8년차 지도자인 허 감독. 그가 선수 시절엔 선수들의 음주 문제를 관리하는 게 감독의 중요한 업무였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회식을 가도 술 대신 사이다를 마시는 게 요즘 선수들이다. 프로가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거야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때론 씁쓸하다. 낭만이 사라졌다. 예전엔 선배가 후배들에게 얼차려를 준 후 미안해서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맞을 땐 그렇게 미워도 술 한잔하면 선배의 따뜻한 한마디에 후배들이 감동의 눈빛을 보내던 시절. 이젠 선수들 사이에 그런 얼차려도, 술자리도 거의 없다. 훈련 끝나면 모두 바로 사라진다. 선수들 사이의 끈끈함이나 팀워크도 많이 줄었다. 허 감독은 그게 아쉽다.
그의 장남 허웅(19)이 올해 연세대에 진학했다. 농구 선배로서 성인이 된 아들에게 조언 하나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술은 마셔도 되는데 너무 많이 마시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술자리에선 항상 매너를 지키고….” 어디선가 들어본 말. 아들은 이 충고를 어떻게 생각할까. 어쨌든 아버지 마음은 다 같은 듯하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