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0’(2011년) 》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누구나 알고 있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질문하고 대답하고 속삭이며 다짐할 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열정 다하던 일을 잃거나 마음 쏟던 이를 떠나보냈는데 그저 뭐 그냥저냥 괜찮다면. 아무렇지도 않다면. 열정을 다하고 마음을 쏟는다고 착각했을 뿐일 거다.
“네 덕에 산다.” “이 낙에 산다.” 그러니 허투루 입에 담을 소리가 아니다. 삶에 대해 확정적인 타자나 외연이 하나라도 있던가. 없어지면 그만 살 텐가.
주인공 애덤은 선천적으로 그걸 아는 듯했다. 무엇에든 슬쩍 한 발만 걸쳤다. 그러니 뭐든 대강 그럭저럭 괜찮았다. 공들여 몰두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업무. 애덤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빈대 붙어 의식주 해결하는 얌체 애인. 매사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죽마고우 카일. 다 그냥 쿨 하게 싱긋. 괜찮은 듯했다.
직장동료, 애인, 죽마고우. 반응은 당연히 판박이다.
“애덤. 괜찮을 거야. 힘내.”
어째 닮았다.
“야, 야. 괜찮아. 세상 널린 게 여자야. 기운 내.”
사실 다들 알고 있다. 세상에 여자가 널렸지만 남자는 훨씬 더 많이 널렸다는 것. 나처럼 괴팍한 놈과 마음 주고받을 여자를 ‘또’ 만날 확률은 꼬박꼬박 빠짐없이 먹어버린 나이에 비례해 이미 한없이 제로에 수렴해 있음을. 만족스러운 길을 멋지게 새로 개척해낼 확률 또한 비슷한 상태임을. 결코 괜찮지 않다는 것을. 그저 다들 마음 무겁고 싶지 않을 뿐임을. 알고 있다.
정말 가슴 저린 상황을 맞닥뜨리면 말을 잊는다. 말의 무력함과 무용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괜찮다”를 건네는 타자들에게 악의는 없다. 한 발만 걸치고 무심히 대한 외연들이었으니 그들도 무심할밖에. 당연한 일이다.
변기에 목을 처박고 술맛 나는 뭔가를 흠뻑 뽑아낸 새벽마다 깨닫는다. 다 헛소리다. 원하는 것은. 한 번이라도 실컷, 펑펑 울면서 “괜찮지 않다”고 맘껏 시원하게 악을 써보는 것.
직시는 괴롭다. 존재가 보채는 달콤한 거짓말을 끊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물들이 자기 이름들로부터 이탈”(‘구토’)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끊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끝없는 도피만 남는다. 계속 한 발만 걸친.
인정하고 직시했을 때, 한없이 제로에 수렴하고 남은 무언가의 희미한 윤곽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바닥 치고 얻은 탄력으로 드라마틱 “오버홀(overhaul)”을 이뤄내 전국대회에서 제꺼덕 우승(‘핑퐁’)할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매일매일 존재한다는 어렵고 매력 없는 임무”(제니퍼 맥마흔·‘가상의 스테이크’)에는 조금 더 충실할 수 있을 거다.
그래. 괜찮지 않아.
그렇게 말해도 싱긋 괜찮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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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g 동아일보 기자. 불혹을 코앞에 둔 주제에 토끼 굴을 찾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