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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약자 승리하다’ 가슴 짠한 성석제표 해학

입력 | 2012-04-07 03:00:00

◇위풍당당/성석제 지음/264쪽·1만2000원/문학동네




9년 만에 장편 ‘위풍당당’을 펴낸 소설가 성석제는 “개그와 문학의 웃음은 다르다. 개그는 순발력과 말재간이 중요하지만 문학은 보수적이고 느리다. 난 일부러 웃기려 했다기보다는 웃을 분위기만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성석제가 돌아왔다. 9년 만에 장편소설을 들고서. 기대감이 컸다. 문단의 소문난 입담꾼인 그가 잔뜩 웅크렸다가 펴낸 장편이 어떨까 하는. 결론부터 말하면 의표를 치르는 해학이며 가슴 찡한 글발은 건재하다. 그렇다. ‘성석제 소설’이란 주식은 여전히 매력적인 문단의 우량주다.

지방 어느 궁벽한 강가에 세워진 사극 세트장. 드라마도 끝나고, 사람들의 관심도 식자 버려진 곳. 이곳에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인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친척들의 횡령으로 빈털터리가 된 영필, 학교재단 이사장 부인이었지만 남편이 죽은 뒤 상속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소희,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한 새미와 자폐증이 있는 동생 준호…. 이들은 피가 아닌 정(情)으로 묶여 의지하고 사는 ‘가족’이 된다.

평온한 일상은 예기치 않게 틀어진다. 인근에 합숙소를 차린 조폭들이 우연히 ‘자연산 미인’인 새미를 추행하려다 부하 한 명이 준호의 급습에 부상을 입는다. 전국구 조폭의 자존심은 무참히 무너졌다. 두목인 정묵은 복수를 다짐하지만 선발대로 갔던 부하들은 소식이 없다. 외딴 곳이라 휴대전화도 불통이다. 후텁지근한 한낮의 더위.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정묵은 부하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선다.

성석제표 웃음의 융단 폭격은 여기서 시작된다. ‘가족’으로 뭉친 강마을 사람들은 도망가지 않는다. 분뇨나 고추, 잿물을 비닐봉지에 담은 ‘똥 폭탄’ ‘고추 폭탄’에 이어 말벌들을 풀어 조폭 십수 명을 간단히 제압한다. 힘의 역전과 의외성. 그리고 약자가 승리하는 통쾌함이 웃음과 함께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하지만 웃음이 다가 아니다.

아마도 소설의 결정적 장면을 꼽는다면 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 직전일 것 같다. 조폭 선발대를 재래식 화장실 구덩이에 빠뜨리는 데 성공한 마을 사람들은 삼겹살을 굽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연다. 어깨춤과 힙합, 강시춤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몸짓까지. 한낮의 열기, 한계치를 넘은 취기. 작은 승리에 대한 기쁨과 다가올 더 큰 공격에 대한 불안감 속의 몽환적 축제이자 제의(祭儀). 엉뚱한 상황에 처음에는 키득키득 웃지만 이내 뭔지 모를 비감(悲感)이 치올라와 가슴이 찌릿해진다.

한바탕 소동의 끝과 함께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열병을 앓은 듯 노곤하게 피곤해지기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필력은 속도가 빠르고 집중도가 높다. 기분 좋은 피곤함이다. 다만 성석제의 장편을 오래 기다린 독자들에게 220쪽 남짓한 짧은 소설 분량은 성에 안 찰지도 모르겠다. 공깃밥을 절반 비웠을 때 밥상을 치운 느낌이랄까.

오랜만에 장편을 낸 성석제는 “좀 부자가 됐다는 느낌”이라며 웃었다. “장편을 쓰고 싶은 욕구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다만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품이 나를 뚫고 흘러내리길 기다렸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