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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이정현 김부겸의 ‘벽을 넘어서’

입력 | 2012-04-09 03:00:00


황호택 논설실장

광주 서을에 출마한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에게 휴대전화를 걸면 인순이의 ‘거위의 꿈’이 신호음으로 흘러나온다. 지역주의라는 강고한 벽을 넘어 하늘 높이 날고 싶은 꿈을 담은 것 같다.

얼음장 녹여 0.7%서 33.2%로

이 후보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간판으로 출마해 고작 0.7%를 득표한 바로 그 지역에 다시 도전했다. 유권자들이 그가 오랜 세월 흘린 땀방울을 알아주기 시작했던지, 1, 2일 진행된 지상파 방송 3사 공동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가 33.2%, 통합진보당(통진당) 오병윤 후보가 30.5%를 기록했다.

1988년 한 지역구에서 의원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가 시행된 이후 광주에서 새누리당의 전신(前身)이었던 당은 단 한 명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광주에서 새누리당의 ‘0.7% 후보’가 8년 만에 오차범위 내라지만 1위를 달리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이 후보는 1995년 광주에서 시의원에 도전한 후 17년 동안 정성을 쏟았다. 그는 “외지인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새누리당에 대한 광주인들의 정서는 2m 두께의 얼음장처럼 냉랭하다. 나는 계속 입김을 불어넣어 두꺼운 얼음장을 녹이고 있다”고 말했다.

1985년 구용상 의원(민정당)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정세분석팀장 미디어기획단장 같은 사무처 주요 당직을 거쳤지만 금배지와는 인연이 멀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국회의원 배지를 그에게 달아준 것은 박근혜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이다. 2008년 18대 공천에서 친이계가 친박계를 배제하면서 박 위원장에게 내준 비례대표 몫은 고작 하나였다. 그것도 당선 여부가 불투명한 22번.

박 위원장은 그 22번을 이정현 후보에게 배정했다. 호남 출신으로 한나라당에 들어가 23년 만에 금배지를 달 수 있는 기회였다. 개표 초반에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당선권이 18번에서 오락가락하다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20번을 겨우 넘어섰다. TV에서는 그의 바로 앞 번호인 21번에서 끊겼다고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중앙선관위 최종 집계에서 22번까지 당선됐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피를 말렸던 밤이었다.

이번 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광주 서을에서 컷오프에 걸린 김영진 의원을 탈락시키고 야권연대를 위해 후보를 내지 않았다. 광주시민은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민주당 지지 성향을 보이지만 민주노동당이 변신한 통진당엔 선뜻 마음이 안 간다는 사람들도 있다.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고 통진당 후보를 찍으라는 것에 “우리가 거수기냐”며 자존심 상해 하는 유권자도 상당수다. 이 후보는 이런 덕을 보고 있다.

대구 수성갑에서는 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당은 다르지만 광주의 이 후보와 같은 처지다. 김 후보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꼈는지 선거공보물에 이 후보 이야기를 담았다.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대의명분을 놓고 대구와 광주를 경쟁시키자는 뜻도 들어 있을 것이다. 지상파 3사 여론조사에서 김 후보는 새누리당 이한구 후보에게 10%포인트 이상 밀리고 있다.

지역주의 끊기 몸부림 의미 있다

김 후보는 “유세 때 이명박 대통령을 공격하면 청중이 옆 사람 눈치 보느라 박수를 못 친다”고 지역 분위기를 소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자는 정서도 강하다. 김 후보는 무슨 근거인지는 몰라도 “현재 7∼8%포인트 지고 있지만 막판 추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구에서 당선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의미 있는 득표율을 올리면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 같다.

그가 총선을 앞두고 펴낸 책 ‘나는 민주당이다’는 ‘TK 출신 김부겸의 인생과 정치’라는 부제(副題)를 달고 있다. 책 서문에 대구 출사표가 담겨 있다. ‘1980년대 양김(兩金) 분열 이후 한국정치는 지역주의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특히 나 같은 경계인에게는 엄청난 고통이며 장벽이었다. TK 출신이 민주당 정치를 한다는 건 웬만한 강심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주의라는 악연을 끊기 위해 몸부림쳐온 것이 나의 정치 역정 그 자체가 돼버렸다.’

김 후보는 민주당에서 비교적 말이 통하는 합리적 온건론자다. 그는 손학규 의원을 지지해 당 대표를 만들었던 일등공신이지만 손 의원은 대선 후보 지지율이 답보 상태다. 오히려 김 의원이 지닌 정치적 자산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수도권의 ‘지방 이주민 사회’를 중심으로 보면 이번 선거에서는 계층의식 세대의식이 두드러지고 3김(金) 정치의 유산인 지역의식은 상당히 묽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호남과 TK 본바닥에서는 지역주의의 그림자가 짙다. 광주 이정현, 대구 김부겸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서 지역주의 구도가 완전히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처럼 의미 있는 도전을 통해 실핏줄 같은 통로가 이곳저곳에서 생기면 국민화합과 사회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