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정치부
하지만 이 같은 기대는 무너졌다. 각 당이 정치 경제 복지 등 주요 분야의 정책을 제시했으나, 정작 이를 놓고 별다른 대결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책대결을 뜻하는 ‘매니페스토’는 말뿐이었다.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았기에 상호 검증은 생략됐고, 조 단위의 숫자와 무지갯빛 정책 아이디어의 홍수 속에 유권자들은 어떤 정책을 누가 만든 것인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술집 호객꾼들도 살아남기 위해 손님들에게 왜 자기네 가게가 옆집보다 좋은지 설명하느라 경쟁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정책대결이 벌어질 자리에는 술집에서도 듣기 어려운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서울 노원갑)의 막말과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을 둘러싼 여야 진실게임 등 네거티브 공세만 난무했다.
이번 총선을 되돌아보면 기성 정치권은 유권자의 판단을 돕기 위한 정책대결을 일부러 피한 듯한 인상마저 준다. 지난달 16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릴 예정이던 각 당 정책위의장 초청 정책토론회는 돌연 새누리당 측이 불참하기로 해 무산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최한 공직선거정책토론회는 각 당 공천이 마무리되기 훨씬 전인 1월 30일, 2월 24일, 3월 5일 열렸다. 공약을 정책으로 만들 후보군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책을 이야기했으니 허공에다 글씨를 쓴 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야가 사활을 걸 대선에서 정책대결을 기대하는 건 더욱 요원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 밖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최근 대학 특강에서 자신만의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여야의 정책 실종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대중이 열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업자득이다.
이승헌 정치부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