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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칼럼/안경환]창의적 상상력은 법의 생명

입력 | 2012-04-14 03:00:00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행복한 사람의 삶은 비슷비슷하다. 재산, 지위, 미모, 건강…. 그러나 불행한 사람의 사연은 구구하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숨은 불행이 있기 마련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은 이런 요지로 세상살이를 압축한다. 고래로 문학은 불행한 사람이 의지하는 행복정(幸福錠)이다. ‘나라가 불행하면 시인이 행복하다(國家不幸詩人幸).’ 이는 청나라 문인 조익(趙翼)의 명구다.

반면 법은 불행한 사람을 더욱 옥죄는 족쇄였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법에 얽힌 사람은 불행하다. 설령 법을 수단으로 이득을 취해도 마음의 부담이 따른다. 그러고 보면 법에 엮인 사람은 ‘객관적’으로 불행하다. 불행한 사람의 아픔을 최대한으로 덜어주는 것, 그게 법의 바른 임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라는 말처럼 냉혹한 언사는 없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이 알량한 허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법의 눈과 귀가 불행한 사람의 눈물과 한숨을 돌볼 수 있어야만 한다.

한 사람의 위대한 작가를 가진 나라는 하나의 대안정부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의 축복을 누린다는 말이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지속적으로 숭앙받는 작가는 세계인의 스승이다. 셰익스피어, 괴테, 위고, 도스토옙스키 같은 대가들의 작품은 국경을 초월하여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메트에 뒤지지 않는 인간정신의 유산으로 공인받는다. 특정 종교와 결속되지 않아 더욱 광범한 사랑을 받는다. 이들의 작품을 종합하면 세계인권선언의 30개 조문을 만들 수 있다.

창의적인 소송과 변론이 세상바꿔


대가들의 특성은 ‘법’과 ‘문학’을 결합하는 데 있다. 그래서 위대한 작품은 법을 떼 놓고 문학만으로 읽어서는 총체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법과 문학은 본시 한 뿌리에서 생성된 것이다. 법도 문학도 소재는 동일하다. 즉, 인간의 공동생활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다룬다. 다만 문학은 갈등을 제기하고 법은 이를 푸는 데 주력할 뿐이다. 문학은 흔히 소수자의 처지에서 세상살이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법은 다수의 관점에서 세상의 질서를 챙긴다. 문학이 개인의 창의에 의존한다면 법은 사회의 보편적 윤리에 기댄다. 그래서 문학적 영웅은 법률가의 눈으로 보면 상식과 보편적 윤리를 팽개친 일탈자이기 십상이다. 인권은 소수자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아우성이다. 문학의 본질도 그렇다. 전형적인 문학은 인권을 등에 업고 법에 대항하는 양상을 띤다. 다수자의 인권은 별도로 논할 필요가 없다. 현상과 제도가 이미 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문학도 비슷하다. 가진 게 풍족한 사람은 새삼 마음의 양식을 구할 필요가 적다.

법에는 제도의 힘이 따른다. 그 힘은 다수의 이익을 지킨다. 그래서 소수는 법에 원한을 품는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은 새로 건설한 대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법전을 제정한다. 그리고 선언한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법의 임무’라고. 강자의 팔뚝과 부자의 돈지갑이 약하고 가난한 사람의 숨통을 조이지 못하도록 마련한 안전판이 법이다. 시대 변화에 둔감한 정체된 법은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문학의 손이 장래를 가리키면 법의 눈도 따라서 주목해야 한다. 문학적 상상력이 법의 경직성을 극복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회정의가 설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기독교문화권에서 대대손손 사랑받는 작품이다. 금전 거래의 당사자가 자유의사로 합의한 ‘인육계약’이다. 계약서대로 집행할 것을 주장하는 샤일록, 목숨이 위태로운 상인 안토니오를 포셔의 창의적인 해석이 살려낸다. ‘살은 가지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 실로 명판결이다. 그러나 판사는 채무자를 구함에 그치지 않고 채권자를 철저하게 파멸시키려 든다. 베니스 사회에서 누적된 모욕과 박해에 시달린 외국인 이교도 샤일록이다. 자비의 판관을 자처한 포셔는 소수자 샤일록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종교마저 빼앗으려 든다. 과도한 창의는 자의(恣意)이자 불의(不義)다.

법과 문학이 함께 세상 보듬어야


우리나라의 사법사에도 명판결, 명변론이 적지 않다. 1980년대의 ‘인권변호사’ 조영래는 창의적인 소송과 변론으로 세상을 크게 바꾸었다. 망원동 수재민의 집단소송,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등 그의 업적은 지대하다. 그는 경직된 법에 문학적 상상력을 입힌 선구자이다. 대한민국은 원룸, 고시촌에서 법관이 탄생하는 나라다. ‘문예창작과’ 같은 공방에서 문인이 양산되는 나라다. 이렇게 제도가 경직된 나라일수록 법도 문학도 창의적인 발상이 절실하다. 성숙한 사회는 시인과 판사가 한 몸이 되는 사회다. 법 따로, 문학 따로가 아니라 법과 문학을 함께 아우르는 세상이라야만 진정 사람이 살맛 나는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