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제공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와 그의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모신 필암서원은 우여곡절을 여러 번 겪었다.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처음 지었는데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려 1624년에 다시 지었고, 1662년에 필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그러다 1672년 지금 위치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된 전라남도 지역의 유일한 서원이 되었다.
필암서원은 다른 서원처럼 앞에는 강학공간이 있고 뒤에는 제향공간을 두었지만, 강학공간의 구성은 다른 서원과 다르다. 보통 서원의 강학공간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앞에 나오고 강학당이 다음에 있는데, 필암서원은 반대로 강학당이 앞에 있고 기숙사가 다음에 있다. 말하자면 보통은 정문-누마루-동재와 서재의 마당-강학당-사당 순으로 서원의 축이 형성되는데, 필암서원은 누마루-마당-강학당-동재와 서재의 마당-사당 순으로 이루어진다.
필암서원은 제향 중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사당을 중심으로 강학공간의 마당을 놓으면서, 출입을 해결하기 위해 ‘ㅛ’자 아래 다시 ‘ㅁ’자로 마당을 두었고, 누마루인 확연루(廓然樓)를 세웠다. 그래서 확연루와 강학당인 청절당(淸節堂) 사이의 마당이 오히려 일반적인 서원의 마당처럼 별 기능 없이 관념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확연루를 들어서자마자 확연한 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확연루는 ‘군자의 가르침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다’는 정자(程子)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서원의 출입이 마치 살림집의 안채로 들어가듯 청절당의 옆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것도 특이하다. 이 특이함이 새롭지는 않은 것은 거기에서 조선 성리학의 쇠락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