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건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 맺는 것
‘열하일기’의 장쾌한 여정에서 연암 박지원은 ‘이용후생’을 설파한다. ‘이용후생’이란 ‘물질을 이롭게 써서 삶을 도탑게 한다’는 의미다. 수레와 온돌, 건축과 벽돌 등 청나라 문명의 근간을 세심하게 관찰해 기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연암의 비전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용후생은 ‘정덕(正德)’으로 귀환한다. 정덕이란 말 그대로 ‘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 이용후생이 문명적 진보를 뜻한다면, 정덕은 존재의 자기구현과 우주적 소통에 해당한다. 삶이란 어떤 경로를 거치건 반드시 이 무형의 가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유와 행복이 없다면 문명과 제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면 물질적 풍요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용과 후생, 그리고 정덕의 트리아드(triad·삼중주)! 이것이 곧 ‘삶의 비전’이다.
‘동의보감’식으로 말하면 양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양생은 생명의 정기신(精氣神)을 자양하는 수련법이다. 하지만 그 수련에는 사회적 윤리를 닦는 ‘수양’과 생사의 관문을 넘는 ‘수행’이 수반되어야 한다. 생명의 핵심이 ‘수승화강’이듯, 잘 산다는 건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능동성과 생리적 순환은 함께 간다. 한편 삶과 죽음은 하나다. 죽음에 대한 성찰과 훈련이 없이 잘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 늘 두려움과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원초적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곧 수행이다. 따라서 양생에는 수련과 수양, 또 수행이라는 ‘세 바퀴’가 필요하다. 이것이 곧 ‘좋은 삶’을 위한 최고의 기술이다.
갑목은 뒷마무리가 약하지만 무엇보다 ‘살리는’ 기운이다. 그래서 오륜(五倫) 가운데 인(仁)의 덕목에 조응한다. 그러므로 나는 소망한다. 갑목의 기운을 타고 불어오는 이 거칠지만 부드러운 바람 속에서 정치가 부디 낡은 전제들로부터 벗어나 양생적 비전과 접속하게 되기를! 하여 아주 낯설고 새로운 삶의 방식들이 도처에서 창안되기를!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