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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장환수의 數포츠]만 49세 투수 모이어의 야구시계는 거꾸로 간다

입력 | 2012-04-21 03:00:00


18일 잠실야구장. 10년 만에 만난 임호균 MBC 야구해설위원. 5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게 여전히 최강 동안이다. 그동안 미국서 잘 지냈는지 반갑게 안부를 묻다가 후배 기자에게 그를 소개해준다. “이 형님 이래봬도 한때는 짱이었어. 프로야구 최소 투구 완봉승 기록 보유자야. 1982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에선 평균자책상을 받았지.” 후배가 맞장구를 친다. “아, 그래요? 저는 그런 기록들이라면 당연히 최동원이나 선동열 같은 무쇠팔이 했을 줄 알았죠.” 신이 난 임 위원. “강속구 투수는 삼진 잡느라 많이 던질 수밖에 없어. 나야 뭐 맞춰 잡는 스타일이잖아. 딱 73개만 던지고 일찍 집에 가 잤지.”

▶빠른 게 느리고, 느린 게 빠르다는 역설. 마침 이날 오전 미국에선 대표적인 느림보 투수인 콜로라도의 제이미 모이어가 샌디에이고와의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최고령(49세 150일) 승리투수가 되는 이정표를 세웠다. 잭 퀸이 1932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세운 기록(49세 74일)은 80년 만에 깨졌다. 세상에나. 투수가 쉰까지 야구를 하다니. 게다가 당당히 빅리그 선발진에 합류해 승리투수가 되다니. 프로야구 통계 사이트 스태티즈(Statiz)에 따르면 투수는 25세, 타자는 27세 때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것으로 나온다. 싱거운 질문이지만 만약 모이어와 동년배인 KIA 선동열 감독이 올해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면 그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기자가 근무하는 동아미디어센터 맞은편 교보문고에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걸려 있다. 모이어에게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는 불같은 강속구도,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도, 칼날처럼 예리한 슬라이더도 없다. 이 때문에 국내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선 선후배는 물론 전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타다. 한화 박찬호도 2년 전 인터뷰에서 필라델피아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모이어를 언급하며 “그에게서 야구와 철학을 배운다”며 존경을 표시했다. 서론이 길어졌다. 독자들도 이 기회에 수포츠를 통해 모이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와 사랑에 빠져보자.

▶모이어를 얘기할 때 화두는 역시 느림의 미학이다. 왼손투수인 모이어는 체인지업이 주무기이며 커터 싱커 슬라이더 커브를 던진다. 체인지업은 시속 115∼120km 정도, 직구인 커터는 강속구 투수의 변화구보다 느린 130km 남짓이다. ‘제구력의 마술사’로 불렸던 애틀랜타의 그레그 매덕스도 이보다는 훨씬 빨랐다. 모이어의 구속은 20대 초반인 대학 시절에도 비슷했다. 1984년 시카고 컵스의 스카우팅 리포트에 최고 구속은 135km라고 돼 있다. 하지만 컵스는 점수를 내주지 않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6라운드에서 그를 지명했다. 모이어는 그해 16승에 평균자책 1.99로 당시 대학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사이닝 보너스 1만3000달러(약 1480만 원)에 계약한 그의 구속은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변화가 거의 없다. 워낙 느린 구속 탓에 갑자기 시속 10km 남짓 빠른 직구가 들어오면 타자들은 160km 강속구를 만난 것처럼 얼어붙었다. 모이어는 클리블랜드 시절 동료였던 찰스 내기의 말처럼 ‘느리게, 더 느리게, 더욱 더 느리게 던지는 법’을 터득했다.

▶모이어의 야구 시계는 영화 속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것처럼 거꾸로 간다. 느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시계이기도 하다. 모이어는 20대에는 34승 54패로 별 볼일 없는 투수였다. 30세 이후에 전체 268승 중 87.3%인 234승을 따냈다. 40세 이후 거둔 승수는 30대 때보다 22승이나 많은 128승이다. 동양인 최다승 투수인 박찬호(124승)를 능가한다.(메이저리그에선 만 40세 생일을 지난 다음부터 카운팅을 하기 때문에 이는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모이어는 2003년 올스타에 뽑혔고 개인 타이틀은 1996년 승률왕(13승 3패)이 유일하다. 그렇지만 각종 통산 기록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다. 268승은 현역 1위이자 역대 35위. 볼넷 안 주기로는 현역 18위이지만 피홈런은 513개로 역대 1위다. 2004년에는 44개의 홈런을 맞기도 했다. 206패는 현역 1위이자 역대 40위다. 2010년 5월 애틀랜타를 상대로 최고령 완봉승을 따낸 그는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등 4개의 데케이드에서 완봉승을 기록한 유일한 투수이기도 하다.

▶워낙 오래 야구를 하다보니 이 밖에도 별의별 기록이 다 있다. 모이어는 1986년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스티브 칼턴을 범타로 처리한 것을 비롯해 명예의 전당에 오른 23명의 타자와 상대했다. 모두 49개의 야구장에서 공을 던졌으며 그중 14개는 이제 없어졌다. 올해 콜로라도의 동료 선발투수 4명 전원을 비롯해 40명의 로스터 중 15명이 그가 데뷔한 이후에 태어났다. 8명의 감독, 16명의 단장보다 나이가 많다. 첫 연봉으로 6만 달러를 받은 그는 남들처럼 대박은 못 터뜨렸지만 8000만 달러(약 910억 원)를 벌었다. 2005년 시애틀과 2010년 필라델피아에서 받은 800만 달러가 최고 연봉이다. 올해는 110만 달러에 계약했다.

▶이제 모이어는 새로운 기록에 도전한다. 메이저리그 최고령 등판은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세이첼 페이지가 1965년 기록한 59세다. 하지만 은퇴 12년 만에 등판한 노장의 투혼은 사실 쇼였다. 연금 수령 문제로 부족한 이닝을 채워야 했던 페이지는 승부가 이미 결정 난 9월에 보스턴을 상대로 등판해 3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이를 빼면 진정한 최고령 등판은 퀸이 50세 되기 엿새 전에 던진 게 최고 기록이다. 모이어는 만 50세가 넘는 내년에 1경기만 던지면 신기록을 세울 수 있다. 메이저리그 기준의 불혹 이후 최다승은 필 니케로의 121승으로 모이어(115승)가 올해 안에도 경신할 수 있다.

▶3남 3녀의 아버지로 과테말라에서 입양한 2명을 포함해 모두 8명의 자녀를 둔 모이어는 야구장 밖에선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단체 모이어 재단을 운영하는 사회사업가다. 투수 최고 영예인 사이영상은 한 번도 못 받았지만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브렌치 리키 상, 루 게릭 상, 허치 상 등 사회봉사와 선행, 모범적인 태도를 보인 선수에게 주는 상은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두 아들은 야구선수이며 어바인 캘리포니아대에서 뛰고 있는 장남 딜런(21)은 2010년 22순위로 미네소타에 지명됐다. 모이어가 아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빌 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