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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초능력 따윈 필요없어!

입력 | 2012-04-21 03:00:00


《 “스펙(초능력) 따위 이 세상에 필요 없다는 걸 보여주겠어.”

-‘게이조쿠 2 스펙 상(翔)’, 일본 TBS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한다. 정확하게는, 히어로물에 나오는 여러 가지 초능력을 좋아한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하는 것을 보는 건 정말 짜릿한 일이다!

최근 본 일본 드라마 중 가장 재미있는 히어로 드라마는 2010년 방영된 ‘게이조쿠2 스펙’이었는데, 여러모로 요즘 트렌드에 맞는 초능력물이었다.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 실은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발현되지 않던 초능력이 갑자기 나타나서 ‘초능력자 세상’이 되거나 그런 세상이 가까워 온다. 초능력자들은 서로 능력을 뺏고 빼앗으며 적이 돼 싸운다. 액션의 스펙터클은 더 화려하게 만들면서 스토리텔링은 더 풍부하게 하는 최선의 선택이다.

아마 이런 전략을 택한 건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든 ‘엑스맨’이나 역시 너무나 미국스러운 히어로물인 미드 ‘히어로즈’가 먼저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메(애니메이션)의 원조, 오타쿠의 나라, 초능력에 대한 요상한 집착이 있는 일본답게 ‘게이조쿠’는 히어로즈 같은 미드와는 다른 점이 있다. 재미있는 건 그런 차이점이 상당히 동양적이라는 것이다.

초능력과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도우마(도다 에리카)와 세부미(가세 료)에게 스펙(초능력)은 선택받은 인간의 특수한 선천적 능력, 혹은 유전자 변이로 인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어떤 충격적인 사건, 혹은 지속적인 발굴을 통해 잠재돼있던 능력이 발현되는 것이다. 이건 어느 순간 깨달음이 찾아온다는 돈오(頓悟), 그리고 지속적인 수련을 통해 불법을 깨닫는다는 점수(漸修), 합쳐서 불교의 ‘돈오점수’(혹은 점수돈오) 아닌가!

얼마 전 일본에서 방영된 ‘게이조쿠 2’의 TV스페셜판인 ‘상(翔)’편을 보면 그런 점은 더 명확해진다.(이하 스포일러 있음) 도우마에게 모종의 스펙이 있다는 걸 깨달은 세부미의 반응을 보자. 세부미는 “난 평범한 사람이다. (스펙을 사용하는 식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다”라며 “스펙에 빠져 있는 너 따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드 히어로즈의 등장인물들은 처음엔 자신의 초능력을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일단 그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능력을 사용한다. 통제할 수 없어 괴로워하긴 해도 그 능력 자체를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오히려 “초능력이 있는 너 자신(또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해”라고 말하며 초능력을 자아정체감, 자아실현의 문제로 연결짓는다. (그런 자아실현의 장면이 나올 때마다 왠지 오프라 윈프리 쇼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게이조쿠2는 다르다. 세부미는 ‘이 세상은 초능력을 지닌 인물이 필요한가, 아니면 평범한 인간들만으로도 충분한가’라는 히어로물의 해묵은 질문을 던진다. 미국 스타일 히어로물은 이 질문에 대해 흔히 히어로 대 일반인, 혹은 히어로 대 히어로의 충돌 또는 싸움의 결과로 답을 대신한다. 그러나 게이조쿠2에서 이 질문은 도우마라는 개인 스스로의 결정으로 답한다. 세부미의 말은 도우마에게 초능력을 가진 자기 자신, 태어난 그대로의 자신을 부정하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당연하게도 결말은 도우마가 자신의 초능력을 포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결말에서 스펙을 포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도우마의 모습에선 ‘인생은 고통. 깨달음을 얻고 삶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련하라’는 식의 동양적 철학이 느껴진다.

한국에는 아직 제대로 된 히어로물이 없다. 굳이 꼽자면 영화 ‘초능력자’나 ‘전우치전’ 정도가 있을까. 히어로물은 잘 만들기 힘든 장르다. 돈도 많이 들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나리오도 있어야 하는 데다 요샌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같은 철학적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제대로 된 히어로물이 없는 한국은, 좀 재미없다.

수세미 동아일보 기자. 이런 자기소개는 왠지 민망해서 두드러기 돋는 1인. 취향의 정글 속에서 원초적 즐거움에 기준을 둔 동물적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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