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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고요하고 적막하게 가난’한 인도 은자들의 노래

입력 | 2012-04-21 03:00:00

◇와온 바다/곽재구 지음/136쪽·8000원·창비




13년 만에 시집 ‘와온 바다’를 펴낸 곽재구 시인. 그는 “와온 마을 가는 길에 핀 하양 노랑 분홍 보라 꽃들이 어질고 착하게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을 닮았다”면서 “내가 쓸 맨 나중의 시 한 편 또한 그런 얼굴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창비 제공

《시인들에게는 자신만의 문학적 곳간이자 삶의 휴식처인 곳이 있다. 김용택 시인에게 그곳이 섬진강이라면 곽재구 시인에게는 와온 마을이다. 2001년 3월 전남 순천시 상내리 와온 마을을 처음 찾은 곽 시인은 그 자그마한 바다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형형색색으로 변해가는 와온의 노을은 드넓은 하늘에서 개펄에 있는 작은 물웅덩이까지 지천에 흩날리는 꽃밭으로 만들었다. 시인은 이곳을 ‘정서적인 고향’으로 삼았다. 그러던 그가 2009년 7월 훌쩍 인도로 떠났다. 문청(文靑) 시절 경도됐던 시성(詩聖) 타고르의 고향인 산티니케탄을 찾아가 1년 반을 보냈다. 그가 체험적이자 영적이기도 한 시간들을 한 권의 시집으로 녹여냈다.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년) 이후 13년 만에 나온 반가운 시집이다. 와온과 인도에서는 같은 해와 달이 떠 시인을 맞았다. 그 속삭임은 잔잔하고 깊었다.》

‘해는/이곳에 와서 쉰다/전생과 후생/최초의 휴식이다//…//달은 이곳에 와/첫 치마폭을 푼다/은목서 향기 가득한 치마폭 안에 마을의 주황색 불빛이 있다’(시 ‘와온 바다’ 중)

‘해는/달 속에서 뜨고/달은/해 속에서 뜨고/해는 솟아올라/저무는 달에게/챔파꽃 레이를 걸어주고//달은 솟아올라/저무는 해에게/라마야나 이야기를 들려주네’(시 ‘산티니케탄’ 중)

시인은 시집 ‘사평역’(1983년)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일생을 섬세한 시어들로 형상화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인도에서 만난 빈자(貧者)들에게도 그 정감 어린 시선은 여전하다. 평생 기차역 근처에도 못 가본 찻집 여종업원, 5개월은 그림을 그리고 한 달은 그림을 팔러 떠도는 화가들이 시어로 살아났다. 시인은 이들을 ‘적빈’으로 칭한다. 보통 ‘적빈(赤貧)’은 ‘몹시 가난하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적빈(寂貧)’으로 바꿔 부른다. ‘고요하고 적막하게 가난’, 그 속에서 세상 이치를 깨달아가는 ‘은자(隱者)’의 이미지다.

‘낡을 대로 낡은 그림 가방을 등에 메고/그가 석양 속으로 떠나는 동안/시를 쓰고 살았다는 지상의 내 이력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시 ‘화가’ 중)

‘풀들이/제 몸 끝에/별 하나씩 붙들고/이승의 끝까지 걸어간다/순례자가/오체투지를 멈추고/얼굴을 풀밭 위에 부빈다/풀과 인간이/함께 껴안고/우는 아침’(시 ‘적빈 7’ 전문)

10년 넘게 시집을 내지 못했던 고난한 시업(詩業)의 짐을 인도에서 잠시 내려놓은 시인은 “그들의 맑은 눈망울과 따스한 마음이 없었으면 이 시집은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며 감사 인사를 전한다. 하지만 시인이 인도에서 보낸 긴 시간과 상념이 다음과 같은 시로 피어났기에 시인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진다.

‘미스티 가게 앞/자전거를 멈춘 연인들은//세월이/잠시 그들 곁에/멈춘 것을 알지 못하지//페달 위에 올려진/푸른 밤의 발 하나//죽은 시인의 언어들이/페달 위에서 가벼운 탄식을 올리는 동안//남은 한발이/지상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와 입맞춤하네’(시 ‘우리 곁을 흘러가는 따뜻한 일초들’ 중)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