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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민동용]폭력 둔감증

입력 | 2012-04-23 03:00:00


▷16년 전 극장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풀 메탈 자켓’을 본 적이 있다. 영화 전반부는 1960년대 베트남전쟁 중의 미군 해병대 신병훈련소가 배경이다. 동작이 굼뜨고 아둔한 신병 파일은 교관 하트먼 중사의 ‘밥’이다. 사격은커녕 총기 분해조차 제대로 못하는 파일을 하트먼 중사는 모욕적으로 대한다. 파일 때문에 단체 기합을 계속 받아 화가 난 소대원들이 어느 날 밤 잠자는 그를 집단 폭행한다. 결국 정신이 황폐해진 파일은 신병훈련소를 나가기 전날 밤 하트먼 중사를 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한다.

▷영화를 본 나의 소감은 ‘아니, 저런 걸 갖고 뭘 저러나…’였다. 영화에서 ‘고문관’ 파일이 받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수준은 당시 육군(정확히는 카투사) 상병이던 내가 보기에 별것 아니었다. 중학교 때 이미 원산폭격(엎드려뻗쳐 자세에서 팔 대신 머리로 몸을 지탱하는 얼차려)을 경험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교 후문에서부터 현관까지 학생을 때리면서 몰고 오는 광경도 목도했다. 논산 신병훈련소에서 구타는 없었지만 영화 속 파일이 듣던 욕설에 버금가는 폭언도 들어봤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섬뜩해졌다. 일상의 폭력에 너무 관대해져 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요즘 학교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교사가 학생을 손찌검하는 건 상상조차 못하고 얼차려도 옛이야기가 됐다. 군대에서 구타와 폭력도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연대장이 고참병들이 때리면 신고하라고 신병들에게 휴대전화가 적힌 명함을 줄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폭력 둔감증(鈍感症)이 잔존하고 있다. 신입생들에게 오리엔테이션이랍시고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고 때리는 일부 대학 이야기가 매년 어김없이 등장한다. 선배 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의 폭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지난주 경북 영주에서 또 꽃다운 중학생이 스스로 삶을 등졌다. ‘자꾸 나를 안으려고 한다. …폭력 서클에 가입하라고 한다’는 소년의 유서를 보면서 ‘저런 걸 갖고 저럴 것까지야…’ 하고 생각했을 성인들이 아마 없지는 않았을 성싶다. 학교 안에서 집단따돌림과 일진을 뿌리 뽑으려 애쓴다 해도 학교 밖 사회가 폭력에 둔감하다면 해결의 길은 멀다. 우리 안에 잠복한, 폭력에 대한 내성(耐性)이 두렵다.

민동용 주말섹션 O₂팀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