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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나는 캐나다 공무원 오늘 또 휴가를 냈다… 탈북자 돕기 위해

입력 | 2012-04-26 03:00:00

加 북한인권협의회 오타와 지부장 알랭 디온 씨




알랭 디온 씨

《 캐나다 오타와에 사는 알랭 디온 씨(42)는 지난 주말 친구들과 아이스하키 게임을 한 후 술집에 들렀다.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디온 씨가 최근 논란이 된 중국의 탈북자 31명 강제송환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친구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동안 자주 봐온 ‘또 시작하는구나’ 하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잠시 ‘그만둘까’ 망설였지만 디온 씨는 굴하지 않고(?) 얘기를 끝냈다. 》
그러자 몇몇 질문이 나왔다. “탈북자들이 영어를 배우면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캐나다나 미국에 와서 살 수 있지 않느냐”에서부터 “탈북자들이 중국인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탈북자인 줄 알고 체포하느냐”는 제법 수준급 질문도 나왔다. 영문으로 번역된 탈북자 수기와 데일리NK 같은 북한 관련 자료를 매일 저녁 열심히 읽고 있는 디온 씨는 중국 공안의 탈북자 체포에 대해 아는 대로 답했다. 그러자 지루함을 못 참겠다는 듯 친구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디온 씨는 “대다수 캐나다 사람은 북한 인권 상황을 모르거나 관심이 있다 해도 기초적인 수준”이라며 “비정하거나 무식해서가 아니라 다만 북한에 대해 모를 뿐”이라고 말한다.

시리아 정부의 민간인 학살이나 과거 르완다의 인종학살 참상은 TV만 켜면 나오지만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김정일이 죽어야 뉴스가 된다. 디온 씨는 북한 핵과 지도체제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현재 수많은 북한 주민이 처한 상황을 널리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북한 인권에 대한 캐나다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는 것이 그의 목표다.

○ 낮에는 국세청 직원, 밤엔 인권운동가


디온 씨는 하루 두 가지 삶을 산다. 낮에는 캐나다 국세청(CRA)의 기업 평가처리(CAP) 담당 매니저로 일한다. 190만 개 기업이 납부한 세금신고서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고 필요할 경우 추가징수 명령서를 발부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1년 중 세금신고가 마감되는 4, 5월에 가장 바쁘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넥타이를 풀고 운동화로 바꿔 신고 북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다. 그의 직책은 캐나다 북한인권협의회 오타와 지부장. 장(長)이지만 밑에 직원이 없는 1인 행동 체제다. 물론 보수는 없다.

낮에는 캐나다 국세청 직원으로, 밤에는 탈북자인권운동가로 일하는 알랭 디온 캐나다 북한인권협의회 오타와 지부장. 지난달 오타와 주재 중국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송환 금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알랭 디온 씨 제공

그는 2월 중순 동아일보의 집중 보도를 계기로 중국의 탈북자 강제송환 문제가 불거진 후 두 달이 넘게 동분서주했다. 지난달 초 오타와 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강제송환 규탄 시위 준비에도 품이 많이 들었다. 시위를 하기 전에 연방경찰과 지역경찰에 몇 명이 참가할지, 어떤 장비를 사용할지, 얼마 동안 할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시위에 참가한 100여 명은 폭설을 뚫고 토론토, 몬트리올 등에서 4, 5시간씩 차를 타고 와 대사관 앞에서 30분간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그는 마음이 뭉클했다. 노력하면 많은 사람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얼마 전에는 오타와대 학생회와 연락해 대학 강당에서 영화 ‘크로싱’을 상영하기도 했다. 영화가 끝난 후 학생과 탈북자들이 대화하는 시간도 가졌다. ‘크로싱’은 디온 씨가 가장 감명 깊게 본 북한을 주제로 한 영화였다. 그는 2010년 이 영화를 토론토에서 보고 울고 말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북한에 대한 책을 읽고 자료를 분석하는 데 그쳤지만 영화를 본 뒤 북한인권협의회를 찾아가 돕고 싶다고 자원했다. 이경복 북한인권협의회 회장은 그에게 오타와 지부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2007년 설립된 북한인권협의회는 토론토에 본부를 두고 북한 인권 실태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 [채널A 영상]미 청문회서 탈북자 모녀 ‘충격 증언’

그는 앞으로 캐나다 대학을 순례하며 ‘크로싱’을 상영할 계획이다. 북한 인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영화나 책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슈를 부각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상점이나 게시판을 찾아다니며 영화 안내 포스터를 붙이는 것이 그의 퇴근 후 일과다. 오타와 한인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는 그는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는 대신 포스터를 몇 장씩 나눠 주고 왕래가 많은 곳에 붙여 달라고 부탁한다.

디온 씨는 전시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물망초 배지를 언제나 달고 다닌다. 지난해 캐나다에 온 박선영 의원이 직접 주고 간 배지다. 지역 방송국들에 ‘서울 트레인’ ‘김정일리아’ 등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100통을 보내면 100통의 거절 답장이 오지만 계속 보낼 작정이다.

○ 年 소득 20% 탈북자 위해 사용

디온 씨는 1996∼2002년 한국에서 6년 동안 살았다. 대학 졸업 후 동양을 경험하고 싶어 한국을 갈까, 일본을 갈까 고민하다 한국을 택했다. 김포공항을 거쳐 친구가 있는 부산에 간 뒤 목적지를 찾다가 무작정 시외버스에 올랐는데 전북 고창으로 가는 버스였다. 그는 고창에 체류하는 유일한 외국인으로 1년 동안 영어학원 강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며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전통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들이 모여 김장 담그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돌아가며 구슬픈 노래를 한 가락씩 부르셨어요. 무슨 노래냐고 여쭈니 자식을 징용으로 떠나보낸 어머니의 슬픈 심정을 그린 노래라고 하더군요. 가슴이 찡했어요.”

그는 “나중에 북한인권운동을 하게 되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풍습인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을 북한은 그저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분노하게 되었다”며 “북한 가정의 방마다 걸려 있는 김일성 일가의 사진 밑에서 수많은 북한 주민이 ‘아버지 수령님’에게 충성하기 위해 노예처럼 살아가는 현실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해 6월 중국대사관 철문을 통해 대사관 직원에게 탈북자 송환 금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전달하는 모습.

디온 씨는 고창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와 학원 3곳과 명지대 어학 프로그램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까지만 해도 북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서울에서 만난 한 캐나다 친구가 ‘탈북자들을 돕겠다’며 중국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무모하다”고 말리기까지 했다. 그러다 기아에 지쳐 북한을 탈출한 주민들의 실상이 외부세계에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2년 캐나다로 돌아온 후 한국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북한 실상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미국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부각되면서 미국 전문가들과 탈북자들이 캐나다로 와 토론회를 했는데 그때도 열심히 행사를 찾아다녔다.

그의 열성은 직장 안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 사무실은 북한 관련 포스터와 벽걸이들로 가득하고 북한 인권을 고발한 책 ‘Nothing to Envy’(한국판 제목: 우리가 가장 행복해·바버라 데믹 저)’를 수십 권 사서 동료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책을 읽은 동료들은 그에게 “(책 내용을) 믿을 수 없다”면서 놀랐다. 지금은 가족이나 친구보다 동료들이 그의 활동을 더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편이다.

디온 씨는 북한 관련 행사가 있는 날이면 아예 휴가를 내고 참석한다. 캐나다 공무원들은 연 24일의 유급휴가를 자신의 일정에 맞춰 사용할 수 있다. 오타와가 캐나다 수도이니 정부와 의회를 대상으로 한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올 하반기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 결의안을 추진하기 위해 토론토와 오타와, 몬트리올 교민들을 중심으로 2000명 정도의 서명을 모았다. 1000명을 더 모아 친한파 의원에게 결의안 발의를 요청할 계획이다. 신숙자 모녀 송환 결의안은 최근 상임위를 통과했으며 조만간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4년 전 집을 산 그는 방 4개 중 3개를 탈북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할 생각이었지만 오타와에서는 아직까지 탈북자들을 찾을 수 없었다. 캐나다로 건너온 탈북자들은 대부분 한인 인구가 많은 토론토에 모여 산다. 인구가 3000명 정도로 적은 오타와에서 탈북자를 만나기는 힘든 일. 그는 현재 방을 세놓고 여기서 나오는 임대료로 활동비를 충당하고 있다. 월급을 합쳐 연소득 10만 달러 중 2만 달러 (약 2280만 원)정도를 북한 인권 활동에 쓰고 있다.

○ “북한 문제는 인간의 문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왜 나서느냐”며 그를 별나게 보는 사람도 많다. 군인 출신인 아버지는 그가 시위에 참여한다고 하면 깜짝 놀라 말리기에 바쁘다. 그는 주변에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에게 “결혼을 안 해 할 일이 별로 없다”고 농을 던진 뒤 본론으로 들어간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나치 강제수용소의 인권 유린에 흥분하며 수십 년간 조사를 하고 관련자를 찾아 응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지구 저편에서 그에 버금가는 참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다른 곳도 많은데 왜 북한에 매달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러면 너는 르완다를 맡아라. 나는 북한을 맡겠다’고 말합니다. 북한 인권 문제는 북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인간과 인류의 문제라고 봅니다.”

북한 인권 활동을 하면서 한인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지역 한인회는 명절 때마다 그를 초대한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그는 오타와 한인 음식점의 단골이기도 하다. 외로울 때도 있다. 캐나다에서 북한 문제를 알리기 위해서는 한인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같은 캐나다인이 더 열심히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망이 있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북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친구들 얼굴에서 ‘(너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지 않게 되는 것.”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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