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정치부장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이 아득한 실존적 각성의 순간은 수많은 예술 작품, 특히 영화에 모티브가 돼 왔다.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식스 센스’의 막판 반전. 주인공인 아동심리학자 맬컴 크로의 눈으로 영화 속 세계를 들여다보던 관객들은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었다는 사실에 일종의 현기증을 느낀다. 영화 속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엔 두 개의 세계가…
2012년 대한민국.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영화 같은 일이 펼쳐지고 있다. 편의상 A와 B세계로 나누자. A, B세계는 지배구조와 작동원리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까지 다르다. A세계인이 B세계의 언어를 해독하려면 ‘통역’이 필요한 수준이 됐다. B세계에선 ‘초딩’ ‘중딩’ ‘고딩’에 이어 ‘유딩’(유치원생) ‘직딩’(직장인)이란 단어까지 나온 지 오래다. A세계의 주축인 중·노년층과 B세계의 주축인 청년층의 언어불통은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을 증폭하고 있다.
언어가 다르니 사물에 대한 개념 규정도 달라진다. 언어와 개념이 다르면 토론은커녕 대화조차 불가능해진다.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안보론이냐, 환경론이냐’로 접근하면 토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B세계 쪽에서 제주기지를 ‘미제(美帝)의 대중국 군사기지’라고 규정한다면 대화조차 불가능해진다. 제주기지에 대한 개념이 원천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A, B세계에선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도, 오피니언 리더도 다르다. B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기관은 ‘나꼼수’, 가장 잘나가는 오피니언 리더는 ‘콩국수’(공지영·조국·이외수)다. 이들이 생산한 메시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빛의 속도로 리트윗된다. B세계에선 A세계의 언론매체인 신문을 읽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신문기사를 인터넷이 아니라 지면으로 읽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희귀종’이다.
두 세계의 충돌로 치닫는 대선
권력자와 연예인, 언론과 오피니언 리더, 심지어 언어와 개념까지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엄존하는 대한민국의 오늘. 국론 분열 수준이 아니라 지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국가적 해리(解離)현상이요, 남북 분단보다 심각한 남남분열이다.
문제는 4·11총선에선 어정쩡하게 봉합된 A, B세계의 갈등이 12·19대선에선 충돌상황으로 치닫는다는 점이다. 엄청난 후폭풍과 국가적 탈진을 몰고 올 두 세계의 충돌을 상상하면 벌써부터 아찔하다. 매트릭스에서처럼 두 세계를 넘나들며 평화를 가져다주는 네오를 기다려야 하나.
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