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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한 그 사람]유시연 바이올리니스트·숙명여대 교수

입력 | 2012-04-27 03:00:00

11년째 열린 테마콘서트는 ‘세 분의 어머니’ 덕택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11년째 한 해도 빠짐없이 열어 온 연주회 ‘유시연의 테마콘서트’를 지난주 무사히 마쳤다. 해마다 힘겹게 준비해 왔지만 올해는 특히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더욱 힘들었다. 그 이유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세 분의 어머니 중 두 분이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같은 두 분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기보다는 두 분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져 깊은 감사를 드린다.

작년 겨울 선종하신 박기주 수녀님은 내가 다녔던 성모초등학교의 교장 수녀님이었다. 20여 년간 학교장으로 지내면서 헌신과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셨다.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하시고, 성인이 된 후에도 졸업생과 그 자녀까지 떠올리며 매일 기도해 주셨다. 대전에 성모학교를 설립하신 1966년에는 당시 학교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스팀난방 시설과 급식시설을 갖추고, 어린 학생들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럼에도 학교 내에 상주하는 교장 수녀님과 다른 수녀님들은 20년 넘게 수녀원에 단 하루도 난방을 켜지 않고 지내셨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겨울이면 병원에서 얻어온 빈 링거액 병에 뜨거운 물을 넣어 안고 주무시다 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박 수녀님은 돌아가시기 전 병환으로 편찮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힘차게 끊임없이 일하는 밝은 모습을 보여주셨다. 삶이 고단하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 박 수녀님께 전화를 드리면 바다와 같은 너그러움으로 나의 영혼을 꼬옥 안아주시며 마음의 평화를 찾아주시는 모습에서 살아있는 성인을 만난 듯했다. 한없이 겸손하고 검소하신 위대한 분을 나의 인격 형성기인 초등학교 시절 뵙게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숙명여대 총동문회 회장을 지낸 문계 회장님을 처음 뵌 것은 내가 음대에서 교편을 잡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작고 가냘픈 할머니 한 분이 연주를 부탁하려고 찾아오셨는데 당신의 취미는 ‘흔하디 흔한 음악감상’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의 음악적 취향과 감식의 귀를 시험하셨는데, 19세기 말 주옥같은 연주를 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에 대해 물어보셨다.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도 20세기 초 황금기 연주자들이었던지라 그 시대 연주자들을 제법 알고 있던 나에게 흡족해하셨다. 보석 같은 귀한 음반을 5만여 장이나 보유하고 계시던 문 회장님은 내가 테마콘서트를 준비할 때마다 그 음반들을 빌려주셨다. 내가 연주할 곡에 관해 바이올린 연주뿐만 아니라 성악, 실내악 그리고 재즈와 팝 장르를 아울러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어떻게 음색의 맛을 내는지 듣고 공부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문 회장님은 내가 귀국한 후 중견 연주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사랑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나태해지지 않도록 매서운 말씀으로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치곤 하셨다. 끊임없이 내가 더 발전하길 바라던 회장님 덕분에 지금까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정성껏 음악회를 준비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었다. 매년 연주회를 앞두고 상담해주시던 문 회장님이 작고하고 처음으로 올해 테마콘서트를 혼자 준비하면서 귓가엔 회장님의 사랑의 잔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문 회장님의 자비로우면서도 엄한 가르침은 앞으로도 나를 항상 긴장시켜 줄 것이다.

내가 가장 의지하는 분은 나의 어머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그리도 내게 엄하셨던 것은 딸의 예민함과 여린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기 때문일까. 지금은 지혜가 가득한 말씀과 끝없는 사랑으로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강한 믿음과 안정을 주신다. 요즘도 무대에 서면 객석 어딘가에 앉아 딸의 연주를 차마 보지도 못한 채 연주 내내 고개 숙여 기도해 주신다. 해외 연주가 있을 땐 현지 시간에 맞춰 새벽 3시라도 일어나 기도로써 어마어마한 사랑과 에너지를 보내주신다. 많은 연주를 했음에도 무대에 설 때마다 한없이 작아지는 나에게 어머니는 “아무 걱정 말거라. 엄마가 기도로 철통같이 지켜줄 테니 엄마만 믿어”라고 말씀해주시는 어머니께 가슴이 시리도록 감사한다. 늘 그래 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나를 지켜주기를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유시연 바이올리니스트·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