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투구 벗었다? 본래 방탄효과 없어정쟁 희생될 바엔? 생사 초연했던 장군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동아일보 DB
그러나 이순신의 전몰(戰歿)에는 오래전부터 어울리지 않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는 설(說)이 그것이다. 24일 충남 아산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주최한 ‘제14회 이순신 학술세미나’에서도 자살설에 대한 논박이 하나의 발표 주제를 차지할 정도였다. 왜 민족의 영웅인 그의 죽음에 대한 이설(異說)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일까.
‘李舜臣防戰免 自丸而死(이순신은 바야흐로 적과 싸울 때 면주·免하여 스스로 탄환을 맞고 죽었다)’
사실 ‘이순신 자살설’의 모든 발단은 위의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면주(免)’라는 단어가 단초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이조·예조·호조 판서를 지낸 이민서(1633∼1688)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모함을 받아 숨진 김덕령(1567∼1596)을 기리는 평전 ‘김장군전’을 썼다. 그중 한 대목에서 이순신이 면주하였다고 쓴 것이다.
이순신의 자살을 논하는 사람들은 김장군전의 면주 대목을 ‘갑주(甲·갑옷과 투구)를 벗다’ 내지는 ‘갑옷을 벗다’고 풀이한다. 그전까지의 전투에서는 갑옷과 투구를 벗은 적이 없던 이순신이 왜 마지막 전투에서 이렇게 했어야 했느냐는 주장이다. 그것도 추운 겨울바다에서 말이다. 그때까지 연전연승했던 그가 자기 목숨을 지키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도 적의 탄환에 맞은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견해이기도 하다. 스스로 삶을 등지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과연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있겠느냐는 논지다.
또 다른 근거는 이순신과 당시 조정(朝廷)과의 불화에서 찾아진다. 이순신은 최후의 승전을 거둔 뒤에는 당쟁의 결과로 어떤 모함이나 모략을 받아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기 쉬울 것임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목숨을 내놓았던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1993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李舜臣의 戰死와 自殺說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 고(故) 박혜일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동족의 모함과 박해, 그리고 조국에 배신당한 비극의 영웅 이순신’이라며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자살설의 역사는 길다. ‘이충무공전서’를 편역한 노산 이은상은 ‘공(이순신)이 죽음을 스스로 취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그것을 반박하는 견해는 충무공이 전몰하던 당시부터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민서의 ‘김장군전’ 같이 자살설에 기우는 글이 있는가 하면 숙종 때 우의정까지 지낸 이이명(李命·1658∼1722)처럼 ‘…나라가 망하면 같이 망하고 나라가 살면 같이 살려 했거늘 공(이순신)이 어찌 차마 스스로 죽음을 취하여 길이 국가를 중흥하려는 큰 뜻을 저버렸을까보냐’(이은상 역)고 반박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순신이 숨을 거둔 이래 약 100년 동안 그의 죽음을 놓고 조선사회에서 논박이 있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 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
-김훈, ‘칼의 노래’(2001년) 표지 글
1990년대 이전까지 이순신은 민족의 영웅이었다. 사실상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 놓여 있던 1908년 단재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순신전’에서 이순신은 민족의 위기를 타개한 영웅으로 그려졌다. 일제강점기에 이순신을 영웅의 모범으로 떠올린 데에는 동아일보의 역할이 컸다.
▼ 조선사회에 대한 불신-편견이 ‘충무공 자살설’ 확대 재생산 ▼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1598년 11월 17일(음력)자가 마지막이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출전 준비를 하는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성웅(聖雄)으로 자리매김한 이순신은 1990년대 들어 점점 인간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소설가 홍성원의 ‘달과 칼’(1993년)에서 탈(脫)영웅의 면모가 나타났던 이순신은 ‘칼의 노래’(2001년)와 소설가 김탁환의 ‘불멸’(1998년) ‘불멸의 이순신’(2004년)을 통해 한 개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장치가 바로 ‘이순신 자살설’이었다.
자신의 적(敵)을 일본 수군과 임금으로 설정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항상 자신이 죽을 자리와 그 방식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내가 수락할 수 없는 방식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다.’(칼의 노래, 261쪽),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방식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적탄에 쓰러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결국 자연사인 것이다.’(칼의 노래, 301쪽)
이를 두고 허명숙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설령 목숨을 보존했다 하더라도 전쟁에서 패했다면 정치력에 의해 다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한 개인의 실존적 위기인 것이다”라고 풀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이는 300여 년 전부터 자살설의 한 배경이 되는 ‘조정과의 불화’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이후 이처럼 자살설이 ‘유행’한 것은 이전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이순신의 다양한 면모, 고뇌하는 이순신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분출된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행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역사학계의 조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여파로 그만큼 이순신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노영구 실장은 “조선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같이 깔려 있었다”고 분석했다. 조선이 위대한 영웅을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부정적인 낙인을 찍어버렸다는 것이다.
‘후인의 얕은 견해를 가지고 공의 죽음에 대하여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은상, ‘李忠武公全書’ 부록
한 조선시대 전공 역사학자는 “몇 년 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2회까지 보다 TV를 끄고 말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고증이 제대로 돼 있지 않고 사실에 어긋나는 내용을 참고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해서도 학계는 비슷한 반응이다. 사실 박혜일 교수의 글 이후로 자살설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학문적인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살설의 근거 중 하나였던 ‘면주’에 관해서는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노승석 교수가 일찌감치 논박을 했다. 노 교수에 따르면 면주의 주()자는 ‘투구’나 ‘갑옷’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옛 문헌상으로는 갑옷보다는 투구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관용적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또, 면주의 출전인 ‘춘추좌씨전’ 희공 33년 4월 기록에서 나오는 고사에서도 면주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적과 싸우면서 격분한 나머지 투구를 벗고 결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형용한 말로 귀결된다고 노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면주라는 행위가 있기까지는 그 사람의 내면에 우국충정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게 옳다”고 논문에서 밝혔다. 따라서 그 동기가 자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설령 이순신이 갑옷을 벗었다 해도 이를 자살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도 있다. 정두희 전 서강대 역사학과 교수는 동짓달 추위에 갑옷을 벗은 것이 의아하다는 자살설의 주장에 대해 “순천과 사천 양쪽에서 일본군의 협공을 받아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추위를 문제 삼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반박했다.
더욱 결정적으로 당시 갑옷에는 방탄효과가 없었다. 그때까지 갑옷은 화살을 막기 위한 것이지 총탄을 막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을 하기 위해, 일부러 총탄을 맞으려고 갑옷을 벗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사실상 군사사 전공 박사 1호인 노영구 실장은 “노량해전은 전함들이 근거리에서 난타전을 벌인 싸움이었다”며 “20∼30m, 길게는 50m 이내에서 쏘았다면 갑옷을 입었어도 충분히 관통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밑에서 녹도 만호로 복무했던 정운(鄭運)은 대조총(구경이 좀 더 큰 조총)을 맞고 숨졌다. 그런데 이 탄환은 정운이 몸을 가리고 있던 나무 방패를 뚫고 그의 몸을 관통할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승전 후 닥칠 ‘죽음’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주장도 일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노 실장은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싸웠다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그걸 자살설로 연결하는 건 무리”라고 했다. 이순신의 사생관이 분명했던 것에 비추어 그는 오히려 죽음에 초연했다고 보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더욱이 선조와의 갈등을 그렇게 염려했다면 그 전에 출정하라는 왕명을 죽음을 무릅쓰고 어길 수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 조선이 이순신을 낳았다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과거 ‘칼의 노래’에 대한 글에서 “식민사관에서 우리를 집중 세뇌시킨 당쟁론이 여과 없이, 아니 더욱 심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약간의 우려를 표시한 적이 있다. 이순신이 ‘자살’에 이르는 과정과 현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려다 보니 조정 내부의 당쟁과 갈등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자살설이 주장하는 대로 그렇게 조선사회가 썩어 있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전쟁을 사실상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로만 조선사회를 이루고 있었다면 어떻게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그 체제 안에 나타나서 높은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한 연구자의 지적대로 자살설은 조선이라는 숲을 보지 않고 이순신이라는 나무만 보는 데서 나타난 돌연변이일지도 모른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