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사랑했던 퇴계, 유언도 “저 매화에 물을 주거라”
도산서원(경북 안동시 도산면)은 퇴계 선생이 타계한 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퇴계가 생전에 직접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에 사당과 서원이 합쳐진 형태로 되어 있다.
현재 1000원 지폐 뒷면의 그림은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다. 겸재 정선의 작품인데 그림 안 작은 서당에서 글(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을 짓고 있는 이가 퇴계다. 그러고 보면 퇴계는 화폐의 앞뒷면에 모두 출현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셈이다.
4월 초, 탐매 스케치여행 소재로 아껴두었던 도산서원의 도산매를 찾아 나섰다. 서원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나무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향나무에게 양보한 끊어진 담장은 자연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였다.
계단을 올라 솟을대문의 문지방을 넘어 서원에 들어섰다. 공기에 살포시 배어 있는 매화향이 먼저 반긴다. 뒷산의 연둣빛을 배경으로 전교당을 향한 계단이 가지런해 보인다. 퇴계는 유언으로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거라”라고 했을 정도로 매화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 매화와 관련한 시를 100편 이상 남겼고, 관기(官妓) 두향과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에도 매화가 등장한다.
비록 유언 속의 나무는 지금 없지만, 아직도 도산서원에는 봄마다 매화꽃이 만발한다. 봄이면 매화꽃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을 퇴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의 시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갈고닦아야 매화가 될까 (前身應是明月幾生修到梅花)
퇴계는 지금 햇살 좋은 어드메에서 고매한 매화나무 한 그루가 되어 한가득 꽃을 피우고 있지는 않을까?
휴게소 밖 구석진 벤치에 홀로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구름 낀 봄밤은 더 없이 운치가 있었다. 매화 그림과 바꾼 커피의 향이 매화 향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밤이라 생각하며 혼자 빙그레 웃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간 지 440여 년. 그의 학문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그의 모습과 자취가 온 국민의 지갑 속에 함께한다는 것도 나름 뜻깊은 일이 아닐는지.
문득 달빛이 잠깐 구름 사이로 내비쳤다. 밤하늘의 짙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은 추위 속에 고매하게 피어 있는 매화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ah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