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전문기자
일생 동안 고락 함께할 ‘동지’
가족을 돌아보는 온갖 날이 달력 한 장에 다 들어 있는데 ‘형제의 날’은 왜 없을까. 괜한 궁금증이 생겼다. 정말 우애를 다져야 할 사람들은 형제들 아닌가? 성서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부터, 형제들을 베고 왕이 된 조선의 태종과 그의 후예들,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드러나는 그 형제들의 비리, 최근 공천과 상속을 둘러싸고 벌어진 형제자매의 대립…. 다채로운 애증사야말로 동서고금의 해묵은 인간 숙제 아니던가. 그래서 하루 날 잡아서라도 우애를 다질 필요가 있는 것이 형제지간 아닌가 말이다.
‘가파른 암벽 길 오르다 보니 아연/갈 길도 오던 길도 간 곳이 없다/금세 굴러 내릴 듯 바윗돌 총총/가로막혀 숨차고 몸이 후들거린다/가야 할 길보다 걸어온 길이 멀어/그만 돌아갈 수도 없는 외통길이다/이젠 한 마리 짐승처럼 네 발로/아찔한 암벽을 기어오른다, 문득/등에 진 배낭이 성가시고 무겁다/미련 없이 당장 버리고 싶다, 허나/오르막길 등짐은 정분이 난 악처다/돌부리에 걸려 몸이 휘청할 때도/찰싹 붙어 균형을 잡아주는 짐이다/…/이 산등성이 하나 오르는데도/애물 같은 등짐이 내 중심을 잡다니/내 무게를 받아주는 악처 같은 빽/나도 짐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짐이면서 빽이 되는 따뜻한 등짐.’(임영조의 ‘따뜻한 등짐’) 가족은 고를 수 없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형제는 가족의 일원이었고 앞으로도 가족이다. ‘짐’이건 ‘빽’이건 각자 할당된 몫은 기꺼이 책임지는 게 도리일 것 같다.
모든 자식이 한결같이 소중하다 하면서도 자녀에 대한 편파적 애정이 남긴 상처는 숱한 작품의 소재로 등장한다. 고른 애정을 나눠주고 키운 형제라도 재능이나 운까지 균등하게 물려줄 순 없기에 생기는 감정의 골도 깊다. 어떤 유명 작가는 당연한 권리인 양 언제나 손 내미는 형제 때문에 화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어느 날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예술적 재능 역시 부모에게 상속받은 무형의 유산이므로 그 결실을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고. 그러자 속이 편해졌다. 부모 형제 자식, 이름 하여 가족은 내가 덕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서 운명적으로 엮인 사이라는 얘기였다.
불평 대신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나라고 하는 존재를 형성하는 원초적 퍼즐 조각을 공유하는 형제, 내가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상처와 기쁨의 추억을 나눌 자매가 있다면, 그것은 부모가 떠맡긴 짐이 아니라 귀한 선물로 여길 일이다. 형제자매가 없는 이의 눈으로 보면 자명한 일이다. ‘일생 동안 고락을 함께할 동지’로 부모가 짝꿍 지어준 사람들, 해가 갈수록 서로 닮은 모습으로 늙어가는 오빠들과 언니를 바라보는 마음이 새삼 짠하다.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