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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엔딩 크레딧

입력 | 2012-05-05 03:00:00


《 “커피 한 잔만.”

- ‘패밀리 맨’(2000년) 중에서
남자는 솔직히 단도직입 말하고 싶었다.

“다시 시작하자.”

그랬다면 여자는 망설임 없이 답했을 거다.

“미쳤구나. 가버려.”

그래서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커피 한 잔만 같이 해 줘.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파리는 다음 비행기로도 갈 수 있잖아.”

‘지금 원하는 전부’라는 말을 편리하게 얼버무렸지만, 상관없었다.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둑해진 공항 카페에 마주앉은 두 사람이 커피 잔에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서로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 위로 엔딩 크레딧이 흐른다.

남자 잭(니컬러스 케이지)은 잘나가는 기업사냥꾼이다. 어쩌다 강림천사 눈에 띈 탓에 13년 전 헤어진 옛 연인 케이트(티어 리어니)와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며 타이어 세일즈맨으로 늙어가는, 가정법 과거완료의 삶을 체험한다. 현실로 돌아온 잭은 사운(社運)이 걸린 클라이언트 미팅을 팽개치고 여자에게 달려간다.

디킨스 할아버지가 생존하셨다면 저작권료를 요구하셨을까. ‘크리스마스 캐럴’의 수많은 변주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다. 대학 졸업반 때 혼자 보다가 많이 울었다. 뭘 안다고.

그 무렵의 나는 커피를 안 마셨다. 블랙은 사약 같아서 싫었고 자판기 커피는 달고나 같아서 싫었다. “젊은 사람이 벌써 몸 생각해 커피도 안 마시느냐”는 놀림을 들었던 일요일 아침 교회 앞의 겨울바람. 민트차를 마시겠다던 나에게 “카라멜 마키아토는 마시기 괜찮을 거야”라던 스타벅스 매장의 음악. 잔인하게 생생하다.

처음 스타벅스에 간 건 외국물 좀 먹은 동아리 친구와 함께였다. 이대 앞. 얻어먹는 거였음에도 화가 났다. “매일 아침 여기 들러 커피를 마신다”던 그 녀석이 돌았다고 생각했다. 딱딱한 의자는 한숨 기대 자기는커녕 30분이면 엉덩이가 아프겠고. 테이블은 다닥다닥 붙여 놔서 앞사람 말보다 옆 테이블 수다가 더 잘 들리고. 자그마치 종이컵이라니. 배식 받듯 줄 서서 기다리다 손수 서빙해야 하고. 자리가 없으면 들고 나가야 하는데 어째서 가격은 똑같은지. 테이블별 전화기 구비 여부와 소파의 품질이 카페 선정 기준이던 당시의 나에게 ‘별다방’이라는 신종 수입품은 딱 도둑놈으로 보였다. 학교 구내식당보다 나을 바 없는 공간인데 이 가격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맛? 잿물 같았다.

12년을 덧입은 나는 매일 세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다. 스타벅스를 피할 도리가 있을 리 없다. 카라멜 마키아토는 쳐다보지 않는다. 그란데 사이즈 한 방이면 다음 날 아침 아랫배가 볼록 처질 정도로 에너지대사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저지방 라테에 샷을 추가해 가장 큰 사이즈로. 대사량이 떨어져서일까. 누군가에게든 커피 한 잔 같이 해 달라 청할 에너지. 없다.

중학교 수업시간의 끔찍했던 기억. 한 명씩 일어나 장래 꿈을 이야기해야 했다. “아기아빠”라고 말했다. 어설프게 웃기려 한 치기였지만 어느 정도는 간절했다.

가정법 과거완료 장래희망 아기아빠는 이제 언제든 어디서든 혼자가 편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패밀리 맨’ DVD를 돌려놓고 딴짓을 한다. 첫 커피 한 잔의 공간. 멀찍이 돌아서 피해 다닌다. 혁대구멍 눈치를 보며 칼로리를 헤아리듯 하루 카페인 섭취량을 헤아리며 욕먹기 일보 직전에 기사를 마감한다.

“이것도 그런 대로 나쁘지 않아.”(‘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물론. 나쁘지 않다.

krag 동아일보 기자. 얇고 깨끗한 잔에 찰랑찰랑 담아 낸 과테말라 드립을 좋아합니다. 어설프고 서툰 글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rag0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