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어머니/김용택 지음·황헌만 사진/256쪽·1만4000원·문학동네◇내 어머니의 연대기/이노우에 야스시 지음·이선윤 옮김/232쪽·1만3000원·학고재
《 5월이다. 진달래와 철쭉이 피는 봄은 내겐 슬픔이다. 10여 년 전 기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집에서 임종을 맞으셨는데, 뒤뜰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분홍색 꽃을 꺾어다 누워계신 어머니 가슴 위에 놓아드렸던 기억이 난다. 봄이 되면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나는, 몇 년 전인가 실제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우연히 열어보았는데 읽지 않은 음성메시지 한 개가 저장돼 있었다. “여보, 비가 오네. 옥상에 빨래 널어놨는데…. 빨래 좀 걷어줘.” 돌아가신 지 5년이 넘었는데 마치 살아계신 듯 생생하게 일상의 말을 걸어오는 어머니가 신기해 듣고 또 들었다. 아버지는 그런 음성메시지가 저장돼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차가운 디지털 기기가 삶과 죽음의 세계까지도 이어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
출판계에도 어머니에 대한 책이 쏟아지고 있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질수록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각각 한국의 시인과 일본의 작가가 펴낸 책 두 권을 읽다 보면 누구나 가슴속에 간직한 모성(母性)에 대한 향수를 더듬게 된다.
올해 등단 30주년을 맞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그동안 한 인물에게서 시를 베껴 썼노라고 고백했다. 바로 그의 어머니다. 몸집이 작고 야무지다고 해서 ‘양글이 양반’으로 불렸던 어머니는 문단 안팎에서 입심 좋고, 삶과 생명에 대한 혜안을 지닌 ‘문맹의 시인’으로 입소문이 나 있었다.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고 참깨 싹이 나온단다” “꽃만 저렇게 하야다 지면 뭐헌다냐. 꽃도 사람이 있어야 꽃이다”는 어머니의 말에 신경림 시인은 “용택이가 시인이 아니고, 너그 어머니가 시인이구만” 하면서 무릎을 쳤다고 한다. 어머니는 또한 베어진 나무의 뿌리와 기둥을 새끼줄로 엮어 생명을 잇고, 뜨거운 물을 마당에 뿌려야 할 땐 흙 속의 벌레들이 눈이 멀까 봐 “눈 감아라. 눈 감아라”라고 속삭이는 분이다.
신간에서 봄처녀로 시집왔다가 어느덧 겨울의 나뭇가지로 늙어가는 노모의 인생을 김 시인은 시와 일기문에 고스란히 담았다. 젊은 시절 그가 오리농사를 망해먹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던 날, 손에 2000원을 쥐여주시며 강가에서 마른 풀잎처럼 울고 계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한다.
빈궁한 살림 속에 평생 호미로 밭을 갈고, 다슬기를 잡아 국을 끓이셨던 어머니의 젖은 다 쪼그라들었다. 할머니의 쪼그라든 젖을 놀리는 손주들에게 어머니는 “니 애비가 다 뜯어 묵고 이만큼 남았다”고 대답하신다.
“손이 터서 쓰리면 우리들은 어머니에게 갔다. 어머니는 젖을 꼭 짜서 발라주었다. 젖꼭지 가까이에 손바닥을 대면 쪼르륵쪼르륵 짜주었다. 그 새하얀 젖을 손등에다 발랐다. 그러면 잠깐은 쓰렸지만 손은 금방 보드라워졌다. 어머니의 젖은 또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나 눈이 아플 때도 쓰였다. 우리들을 반듯이 뉘어놓고는 어머니가 젖꼭지를 눈 가까이 들이대고 젖을 한 방울 뚝 떨어뜨렸다. 그러면 우리는 얼른 눈을 끔벅끔벅해서 젖이 눈에 고루 퍼지게 했다. 그러면 눈도 역시 보드라워지곤 했다.”
‘둔황’ ‘풍도’ ‘빙벽’ 등을 쓴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1907∼1991)의 ‘내 어머니의 연대기’ 삼부작은 나이가 들어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을 기록했다. 통곡하는 비통함만 슬픔의 표출방식이 아니듯, 노년과 치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담담하게 그려낸 이 자전적 소설에는 조용한 침묵과 담담한 시선으로 풀어낸 아픔이 담겨 있다.
팔순을 넘기고 기억이 사라지는 어머니는 처음엔 같은 말을 반복하시다가, 점차 먼저 돌아간 남편의 존재를 잊고 자신을 돌보는 아들딸마저 하인으로 여긴다. 그리고 어린 시절 양자로 들어왔던 친척 오빠에게 품었던 연정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한다. 작가는 “어머니는 걸어온 긴 인생을 70대, 30대, 10대, 이렇게 걸어온 방향과는 반대로 지우고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부의금 명세를 적어놓은 ‘부의금첩’을 가슴에 품고 다니며 밤마다 달빛 속에 배회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가족의 안타까운 시선이 작가의 따스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묘사된다.
“나는 스물셋의 젊은 어머니가 아기인 나를 찾아 헤매며 심야의 달빛이 쏟아지는 길을 걷는 그림을 눈 속에 그리고 있었다. 내 눈 속에는 또 하나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환갑을 넘은 내가 여든다섯 살의 늙은 어머니를 찾아 같은 길을 걷는 그림이었다. 한 장은 차가운 무언가에 젖어서 빛나고, 다른 한 장에는 무언가 황량함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장의 그림은 곧 내 눈꺼풀 위에서 겹쳐 한 장이 되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