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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희의 ‘광고 TALK’]낭만에 대하여

입력 | 2012-05-07 03:00:00


김병희 교수 제공

위스키가 없었다면 폭탄주 제조를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의 병권은 내가!”라면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주당들의 허세도 사뭇 달라졌을 터.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이라는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의 노랫말도 달라졌으리라. 우리가 지레 짐작하듯 개화기에 살았던 분들이 전통적인 막걸리만 마셨던 게 아니었다. 놀라지 마시라. 서민들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겠지만 일부 특권층은 위스키도 마셨으니까.

대창양행의 위스키 광고(만세보 1906년 11월 5일)를 보자. 위스키병 모양을 제시하고 “우이스기(위스키) 상품(上品) 직수입”이라는 헤드라인을 썼다. 곧바로 다음과 같은 카피가 이어진다. “폐점(폐店·저희 상점) 일수(一手·독점) 판촉의 묵계. 남 우이스기난 품미(品味·맛) 양호하야 세계 각국에 전파 개지(皆知·모두 앎)하오니 상품(上品) 우이스기 구하시난(구하시는) 이난(이는) 폐점에 내구(來求·방문하여 구함)하시압. 본품은 경성 급(及·및) 인천 각 양화점(洋貨店)에셔도 판매하오.”

요약하자면, 위스키를 독점 판매하기로 묵계했으니 필요한 분들은 직접 상점에 와서 사가라는 뜻이다. 두루 알다시피 스코틀랜드의 토속주였던 위스키는 1900년대 초에 대량생산을 하면서 세계에 널리 퍼졌는데, 개화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에도 벌써 들어왔던 것. 광고에서도 세계 각국에 전파되어 모두 알고 있다(皆知)는 점을 강조했다. 그만큼 양품(洋品)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고나 할까. 더욱이 일제강점기 이전인 1906년에 ‘우이스기(ウイスキ)’라며 일본어를 병기한 것을 보면 일본의 야심은 우리네 일상생활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도라지 위스키든 스카치나 몰트위스키든, 위스키를 마실 때면 이래저래 낭만적인 기분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폭탄주 제조만 하지 말고, 이 광고를 보면서 정치적인 지배보다 더 정교한 전략이 상품을 활용한 문화적 지배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면 어떨까. 상품마다 해괴한 영어 브랜드 이름을 써서 우리에게 ‘글로 벌’을 주고 있는 글로벌 시대에는 더더욱.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