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M. Butterfly’ ★★★★
프랑스 외교관과 중국 경극 배우 사이의 20년에 걸친 실제 스캔들을 극화한 연극 ‘M.Butterfly’에서 여장남자 송릴링 역의 김다현 씨와 그를 사랑한 르네 갈리마르 역의 김영민 씨. 꽃미남 김다현 씨의 체격이 김영민 씨를 압도하다 보니 여장 역을 소화하는 전반부보다 남장으로 등장하는 후반부에서 더 돋보였다. 연극열전 제공
실화를 토대로 한 연극 ‘M. Butterfly’(연출 김광보)는 그렇게 환상이 현실을 통째로 삼켜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프랑스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스파이 혐의로 수감된 르네 갈리마르(김영민)는 감옥에 들어오게 된 사연을 관객에게 회상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러면서 자신의 ‘환상 속 그대’ 송릴링(김다현)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르네는 평소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좋아했다. 릴링은 그가 주중 프랑스대사관에서 근무할 당시 이웃 대사관에서 공연된 나비부인의 주인공 초초상을 연기한 중국 경극 배우다. 르네는 릴링을 본 순간부터 묘한 매력에 빠져든다.
르네에게 나비부인은 환상과 죄의식의 원천이다. 철저히 남자에게 복종하는 순종적 동양적 여인이란 성적 판타지의 대상인 동시에 그것이 제국주의적이고 남성우월적인 시각의 산물이라는 죄의식을 일깨우는 존재이다.
릴링은 처음엔 그런 르네의 죄의식을 일깨우며 그의 가슴에 파고든다. 거만하게 담배를 피우며 서양 남성의 근거 없는 우월감을 조롱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르네의 환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지극히 순종적인 여성으로 변신한다. 왜? 관객도 이미 그 순간 다 눈치 챘듯이 송릴링은 중국 정부가 심어둔 스파이였으니까.
연극에서 중요한 것은 르네가 릴링의 유혹에 넘어간 사실에 있지 않다. 르네가 릴링이 여장남자인지를 정말 모른 채 20년간 남녀관계를 지속해 왔느냐도 극적 재미를 위해 필요한 장치일 뿐이다. 릴링의 진심이 뭐였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연극 속 릴링은 철저히 르네라는 사내의 욕망이 투사되는 텅 빈 스크린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릴링이 여성인지 남성인지조차 모호함 속에 던져 둔 채 오로지 자신의 환상에만 탐닉할 수 있었던 한 사내의 정신세계다. 돈 권력 외모 모두 갖지 못했던 그에게 객관적 진실보다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낭만적 거짓이었다.
르네의 환상 속에선 릴링이 희생양이고 르네가 폭군이다. 하지만 현실적 관점에선 뒤바뀐다. 르네는 자신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릴링에게 끊임없이 정보를 제공한다. 르네에게 이용당하는 척하면서 그를 이용하는 사람이 릴링이기 때문이다. 르네는 이를 눈치 챘으면서도 모른 척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환상의 지속일 뿐이니까.
그 환상이 깨진다. 릴링이 게임의 법칙을 깨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남장으로 나타나 “현실을 직시하라”고 일갈하는 순간이다. 낭패한 르네에게 남은 선택은 뭘까. 환상의 짝꿍인 죄의식으로 도망치면서 환상 속 배역을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릴링에게 폭군 핑커튼의 역할을 부여하고 스스로는 순결한 희생양인 나비부인이 되어 “명예와 함께 죽으면 살고, 치욕과 함께 살면 죽으리라”라는 오페라 속 가사를 실천하는 것이다.
환상의 치명적 위험성은 여기에 있다. 환상에 한번 잡아먹히면 스스로를 희생시킬지라도 현실도피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 i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동명 영화로 유명하지만 원작은 중국계 미국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이 1988년 발표한 희곡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연극적 묘미가 일품이다. 송릴링 역으로 정동화 씨가 번갈아 출연한다. 6월 6일까지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4만∼6만 원. 02-766-6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