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문화부 차장
2000년대 들어 정치학자들에게 재조명 받는 나치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의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잊혀졌던 슈미트가 주목받는 것은 그의 정치사상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냉전 종식과 더불어 ‘역사의 종언’을 가져왔다고 찬미 받던 자유민주주의가 심한 무기력 증세를 보이면서 그의 자유민주주의 비판을 건설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 기초하는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정치의 영역에 엉뚱하게도 윤리나 경제의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는 오늘날 한국의 상황과도 맞물린다.
이런 반정치의 악순환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되풀이돼 왔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정권 차원으로 한정하기보다는 국민 전체의 의식 차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민주화 이후, 특히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다원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론 강렬한 일원주의에 사로잡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부와 명성, 권력은 각기 다른 가치기준이었다. 오늘날엔 돈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입신출세의 방편이었던 공부도 마찬가지다. 과거 ‘국어 영어 수학’으로 나뉘었던 평가기준이 영어 하나로 일원화되고 있지 않은가.
정치에서도 대화와 타협의 고유 논리가 아니라 ‘저비용 고효율’의 기업논리가 지배담론이 된 지 오래다. 정치의 정점에 선 대통령이 정치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은 그래서이다. 심지어 대통령으로부터 사면 복권의 혜택을 입은 기업총수가 그 대통령의 정부에 대해 “겨우 낙제는 면했다”고 면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 분야에서 나타난 이런 일원화 현상은 또 다른 폐해를 낳는다. ‘코드정치’라는 논리 아래 다른 영역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자율성을 파괴하는 일이다. 임면권자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예술계의 수장을 꿰차고 ‘개혁’이란 명분 아래 문화예술의 본령과 동떨어진 일을 벌이다 정치권 주변을 기웃거리는 이들이 정파의 좌우를 넘어 많아졌다.
권재현 문화부 차장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