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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자연의 무수한 생명체들… 그속의 나, 경이롭다

입력 | 2012-05-12 03:00:00


《 “그러나 영특하고 건전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도 훤히 솟구쳐 오른 태양을 잊지 않는다.”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늦은 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아파트 거실 창마다 켜진 환한 불빛이 보이곤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가족들이 소파에 파묻혀 뉴스를 보거나, 과일 한 점을 베어 물고 연속극에 빠져드는 시간. 평화로운 도시의 밤 풍경. 시험, 등수, 입시 스트레스로 밤잠을 설치던 그때 가장 부러웠던 건 그 시간 죄책감 없이 거실 텔레비전 앞에 앉은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일을 마친 후 남은 시간, 또다시 ‘뭔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쏟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 한때 치열하게 내달렸고, 선택의 기로에 부딪혀 고뇌했으며, 불안과 혼란으로 점철된 ‘가능성’의 날들을 모두 지나온 사람들. 포기가 용서되는 이들. 시험, 등수, 입시, 미래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질 때마다 아파트의 환한 거실 창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나도 얼른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 뭐가 되든지, 제발 빨리만.

얼마 전 똑같은 길, 여고생 때 ‘인생의 모든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노년기로 접어들고 싶다’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걷던 그 길을 다시 걸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걸 깨달았다. 저녁 식사 후 나선 가벼운 산책길이었다. 그때처럼 늦은 밤이었고, 단지마다 불빛으로 환했다. 하지만 기분이 달랐다. 거기엔 보랏빛 밤하늘, 먼 달, 선선한 공기, 풀, 개천, 솜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있었다. 온 감각으로 그것들을 느끼며 걷는 동안 살아 있다는 느낌이 생생히 들었다. 그 시절이라고 날씨가, 자연이, 하늘이 달랐을까. 모든 게 같았지만 그땐 한 번도 그런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문득 살아 있으면서도 산 것처럼 지내지 못했단 아쉬움이 들었다. 소중한 시절, 중요한 것들을 많이 놓쳤다. 먼 곳만 보고 있어서였다. 깨금발로 커 보이려 안간힘을 쓰는 어린 아이처럼 조급증만 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그때와 비슷하게 살고 있다. 빡빡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주어진 하루를 감사히 만끽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출근하면 퇴근 시간을, 월요일이면 다시 찾아올 주말을 가장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다. 화수목금을 건너뛰고 바로 토요일로 직행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샐러리맨이 느끼는 가장 큰 비극. 하루는 매일 아침마다 현관 발치에 떨어져 있는 조간신문처럼 감동 없이 찾아온다. 그저, 떨어져 있으므로 주워 올릴 뿐이다. 버거운 업무, 잦은 회의, 지겨운 회식. 원하던 인생이 이런 거였을까 의심스럽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을 헤지(hedge·위험분산)하기 위해, 당장의 출근길을 견딘다. 납땜질 하듯이, 하루를 때우고 본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자족하면서.

입시지옥, 취업난, 적자생존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미래’를 위해 오늘을, 현재의 스스로를 희생하도록 끊임없이 단련 받아왔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예시키고, 장밋빛 미래란 ‘D-day’를 향해 카운트다운하며 하루를 재빨리 날려버리는 데만 집중한다. 살면서 늙어가는 게 아니라 늙기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느라 이 좋은 젊은 날들을 다 흘려보낸다. 오늘을 사는 순수한 행복함,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 채로. 그런데 ‘월든’을 읽다보면, 잃어버린 즐거움이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꽃이 피고 신록이 짙어지고, 잎이 물드는 과정, 하늘빛이 변하고 빗소리가 들리다 바람이 부는 만물의 신비로운 법칙에 주목하는 것. 그 조화로운 세계 속에 스스로가 생동하고 있음을 더없이 분명하게 느끼는 일.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생략하고 싶은 하루, 건너뛰고 싶은 한 주가 여전히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도 잊지 말자. 오늘도 대지 위로 훤히 솟구쳐 오른 태양. 저 놀랍고도 경이로운 하늘 아래 내가 숨쉬고 있다는 걸.

톨이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

appen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