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그의 체험담을 들으면서 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예수를 연상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에 그 형극의 가시밭길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불안과 공포 속에 묵묵히 순명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랬던 예수가 이제 우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홍콩의 친구는 실로 용감했다. 나에게도 그 길을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나도 간절히 기도할 때가 있다. “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제가 해온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합니까?” 나는 아직 그분의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가 걸어온 길을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걷는 것이 나의 십자가라는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나는 서울대 교수로서 2010년 2월에 정년을 했다. 30년 이상을 가르쳤으니 큰 혜택을 받은 셈이다. 정책자문, 사회봉사활동도 해보았다. 그러면서 학자로서의 꿈을 갖게 됐다. 학자의 꿈이기에 폼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루기 쉬운 것은 더욱 아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꿈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가 장악한 이론 헤게모니에 맞서 동아시아의 사유 방식이 녹아 있는 대안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공헌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제2 광복’의 꿈이 제2 근대화에 맞닿아 있다. 김구 선생의 문화국가론이 제2 근대화를 떠받든다. 김대중 정부 때 시작했던 지식정보 소통 혁명이 제2 근대화를 이끄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물론 넘어야 할 벽도 높다. 근대화에 가려진 국가시대의 폭력체질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미증유의 위험에 빠지고 있는 시민들에게 어떻게 삶의 안전과 복리를 보장할 것인가. 시민이 이끄는 소통혁명의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열 것인가. 제2 근대화의 과제는 실로 다양하고 막중하다.
나의 소망은 이런 미래의 건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구와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서양과 동양을 분리하는 상대주의는 단견일 뿐이다. 서구를 포용하는 열린 시각으로 동아시아의 긍지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코즈모폴리턴 시각이 필요하다. 나는 남은 인생에서 그런 길을 잘 걷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올여름에도 하버마스, 울리히 벡 같은 석학들을 사저에서 만날 때 그런 대화에 충실하고 싶다.
내가 정년 이후 베이징대에서 강의를 계속하는 데 대해 주변 사람들은 힘들지 않느냐고 걱정을 한다. 고마운 일이다. 왜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장에 몸의 닻줄을 대지 않고는 중국 사회의 변동을 체감하기 어렵다. 학생들의 빛나는 눈빛과 날카로운 질문, 중국의 미래를 응시하는 불만 어린 시선들이 나와 마주칠 때 나의 가슴은 뛴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나의 십자가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