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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의 새벽편지]부모는 활이고 자식은 화살이다

입력 | 2012-05-17 03:00:00


정호승 시인

아들이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 준비를 할 때였다. 복학 신청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아들은 등록금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등록금 내야 한다는 말을 안 하니?”

내가 궁금해서 묻자 아들은 복학 신청을 했는데도 학교 인터넷 사이트에 등록금 고지 내용이 뜨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는 은근히 걱정이 돼 좀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다. 아들은 학교 회계팀에 전화해 보고는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복학이 된다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이미 등록금을 내고 입대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였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입대 휴학을 하려고 하자 학교 측에서 그 학기 등록금을 미리 내야 한다고 해서 냈다가 되돌려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집안 형편상 등록금 내기 힘들어 군에 먼저 가려는 학생은 어떡하느냐, 이건 재고해봐야 할 문제다.”

나는 그때 학교 측이 일 처리를 잘못한다고 생각돼 항의 전화를 해서 돈을 되돌려 받은 적이 있었다. 학교 측에서는 복학할 때 등록금 인상분은 받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반환해주었다. 그래도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닐까 싶어 지난 통장을 찾아보자 분명 입금이 돼 있었다. 아들이 입대한 뒤 되돌려 받았기 때문에 아들은 그런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아니다. 되돌려 받은 게 분명하다. 등록금을 내야 한다.”

부모의 삶이 자식의 삶의 태도 결정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순간 내 마음이 흔들렸다. 학교 측에서 내라고 하지도 않는데 이대로 내지 말고 그냥 지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담당자가 등록금을 받은 사실은 기록해놓고 반환한 사실은 누락시킨 게 분명했다. 이미 그렇게 전산 처리돼 있기 때문에 잘못이 드러날 까닭이 없었다. 안 내면 안 내는 대로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설령 나중에 드러난다 해도 그때 내면 그뿐일 사항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도 한순간 그렇다면 굳이 낼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버지인 내가 부정한 모습을 보이면 아들이 앞으로 부정을 긍정화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한테 분명한 태도로 말했다.

“이건 담당자의 실수다. 남의 실수를 악이용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내 아들인 네가 복학해서 다시 공부하는데 아버지인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다. 항상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사는 게 중요하다.”

나는 아들에게 담당자를 찾아가 언제 얼마가 학교 측 명의로 내 통장에 입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고 다시 등록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당연한 결정이지만 얼마나 잘한 일인지 참 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다. 만일 그런 사실을 숨긴 채 등록금을 내지 않고 복학하게 했다면 아들 앞에 두고두고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그렇게 속여서 대학을 졸업하게 해서 아들이 사회에 나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한때 그것은 일상의 사소한 일로 여겨졌지만 세월이 갈수록 인생의 중요한 일로 느껴진다.

부모는 활이고 자식은 화살이라고 했다.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기 위해서는 활의 정확도와 성공도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안정된 자세에서 정확한 방향을 향해 화살을 힘껏 쏘았다 하더라도 그 순간 활이 흔들리면 화살이 제대로 날아갈 리 없다. 부모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활이 되어야 한다. 부모의 삶의 태도는 곧 자식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다.

나는 화살인 아들에게 아버지라는 활로서의 바른 자세를 보여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내가 잘못 만들어진 활이라면 아들 또한 잘못 날아가는 화살이 될 게 뻔하다. 이미 잘못 날아간 화살을 활은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내가 부모로서의 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면 화살로서의 아들도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아들 앞에 항상 떳떳하고 당당하다. 아들 또한 자기 자신과 이 사회 앞에 늘 당당한 태도를 지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아들에게 “너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이냐”고 물어보자 아들이 “당연히 등록금을 내야지요” 하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부모로서의 활의 구실 제대로 해야


화살은 활이 많이 휘면 휠수록 멀리 날아간다. 멀리 날아간 화살일수록 역으로 그 화살을 날려 보낸 활은 많이 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허리가 휘면 휠수록 자식은 그만큼 멀리 나아간다. 활은 휘어질수록 그 고통이 심하지만 오직 화살을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 그 고통을 참고 견딘다.

실제로 늙은 부모의 육체는 등이 활처럼 굽어진다. 그동안 화살인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하며 활의 역할을 다해 왔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활처럼 깊게 휘어지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식도 그만 자기 자식의 활이 되고 만다.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