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콤플렉스’ 벗어나려면 60세 이후 재충전을
하긴 그렇기도 하다. 빈부격차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더 강고한 것이 세대갈등이다. 일단 우리 사회에는 노년과 청년이 허심탄회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사회 전체가 오직 청년 문화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데 있다. 최근에 불고 있는 ‘동안 열풍’은 성숙을 거부하는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노년층의 소외를 한층 더 심화시킨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세대 콤플렉스’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오히려 이와 반대였다. 이팔청춘이 지나면 바로 성인이 됐고 마흔 이후면 스스로를 노인으로 규정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수치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연륜과 지혜가 깊어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서당의 풍경을 떠올리면 알겠지만, 당시에는 노인들이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노년과 소년의 만남. 이것은 오행상으로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조합이다. 아이들은 양기 덩어리고 노인들은 음기가 충만하다. 하여 서로를 끌어당기게 마련이다. 조부모들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것도 이런 이치에서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키케로)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미 연로해진 소포클레스에게 어떤 사람이 아직도 성적 접촉을 즐기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이고 맙소사! 사납고 잔인한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이제 나는 막 거기서 빠져 나왔소이다’라고 적절하게 대답했다네. … 마음이 성욕과 야망과 투쟁과 적대감과 온갖 욕망의 전역을 다 치르고 나서 자신과 산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자신과 더불어 사는 최고의 길이 바로 공부다. 물론 이때의 공부는 자기 삶에 대한 탐구, 곧 지혜를 의미한다.
또 공부는 노년과 청년이 항상적으로 조우할 수 있는 최고의 장이기도 하다. 춤이나 노래, 스포츠 등은 세대 공감에 한계가 있다. 신체적 리듬을 맞추기가 어려운 탓이다. 하지만 공부는 모든 세대를 망라할뿐더러 나이가 들수록 더 잘 어울린다. 질 들뢰즈는 말했다. “노년기의 젊음이란 청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에 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지혜를 일구는 것보다 더 창조적인 활동은 없다. 그 열정의 네트워크 속에서 ‘세대 콤플렉스’를 벗어나 청년들과 떳떳하게 교감할 수 있는 ‘다른 노년의 탄생’을 기획해야 할 때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