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사랑의 다문화학교얼굴 아닌 가능성 주목했더니 ‘받아쓰기 0점’서 과학 꿈나무로
《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2007년에 1만4654명이던 다문화가정 학생은 2011년 3만8678명으로 급증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고 꿈을 키워주는 다문화학교도 점차 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서울과 충북 제천에 서울다솜학교와 한국폴리텍다솜학교가 문을 열었다. 기술·직업 교육을 중심으로 한 다문화 대안학교다. LG는 2010년부터 ‘사랑의 다문화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어떤 빛깔의 꿈이 영글고 있는지 직접 들어봤다. 》
바수 데비(오른쪽)와 혜나 자매가 LG 사랑의 다문화학교 졸업장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LG 제공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문화를 알고 있고, 새로운 지식을 개방적인 태도로 흡수할 수 있거든요. 나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 원동력은 자신감과 당당함
데비의 아빠는 인도 출신의 대학 강사다. 한국에 유학 와서 대학원을 다니다 한국에서 한국 여인과 결혼했다. 이들 가족은 데비가 7세 때 인도로 떠났다가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글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기에 초등학교 2학년 때 전학 와 치른 첫 받아쓰기 시험에서 0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위축되거나 의기소침해진 적이 없었다.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생활한 덕에 성적이 더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전교 1등도 하며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데비의 태도는 여동생 혜나(13)에게도 영향을 줬다. 혜나는 “공부도 잘하고 학교생활도 활발하게 하는 언니에게 지고 싶지 않아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혜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틈만 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혜나 주위엔 친구가 많다. “그냥 겉모습만 보면 사람들은 우리 아빠가 인도 출신인지 몰라요. 그렇지만 내가 당당하면 내 배경을 먼저 얘기할 수 있고 친구들도 편견을 갖지 않아요. 스스로 위축될 때 누군가가 ‘너, 다문화가정이라며’라고 했을 때 ‘들켰네’ 하는 심정을 갖는 거예요. 나부터 자신감을 갖고 학교생활을 하면 문제될 게 없답니다.”
○ 다문화학교를 통해 진로 모색
데비와 혜나는 다문화가정 학생에게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가장 큰 수확은 꿈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가게 됐다는 점이다. 과학과 미술을 좋아하는 혜나는 전자기기 제품 디자이너가 되려고 한다. 프라다폰을 개발한 조영민 LG 수석연구원의 강연을 들은 게 계기였다. 혜나는 이때 전자제품을 디자인하는 직업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데비도 다문화학교를 통해 진로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중학교 때 방송반에서 열심히 활동했는데 하루빨리 방송기계를 만져보고 싶어서 실업계고에 진학하려고 했다. 멘토인 KAIST 재학생은 데비에게 조언했다. “당장 방송기계를 다루는 것도 좋지만, 대학에 가도 다양한 기회를 누릴 수 있어. 성적이 좋은데 외고에 도전해보는 건 어떻겠니. 가능성을 더 넓게 열어두자.” 데비는 이 말을 듣고 외고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 꿈을 키우는 다문화학교 학생들
데비와 혜나는 LG 사랑의 다문화학교를 올 1월 졸업했다. 12일부터 ‘LG이노텍과 함께하는 사랑의 과학 리더 클럽’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는 LG다문화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꾸준히 꿈을 키우도록 수준 높은 교육을 무료로 제공한다.
학생들은 “엄마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 “한국인에게 다양한 외국 문화를 알려주고 싶다”고 앞 다투어 발표했다.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꽃처럼 피어올랐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 “나만의 특기 살려 관광-컴퓨터 전문가로” ▼
■ 서울다솜학교
최근 서울 중구의 서울다솜학교 호텔관광과 실습실에서 자신이 만든 무알코올 칵테일을 들어 보이는 이형준 군(왼쪽)과 조려화 양. 이들은 서울다솜학교의 실용적인 직업교육 프로그램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잔에 얼음을 넣고 탄산수와 칵테일 시럽을 섞으니 이내 붉은색 칵테일이 완성됐다. 시음에 나선 1학년 조려화 양(17)이 “마트에서 파는 음료수보다 훨씬 시원하고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 “실용교육으로 삶의 목표 찾았다”
아버지가 일본인인 이 군은 7세 때 한국에 왔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간신히 한국어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성적은 늘 하위권이었다. 당연히 학교생활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이 군에게 올해 초 출입국관리소가 다문화 청소년을 위한 ‘서울다솜학교’를 개교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직업교육을 받아 빨리 사회로 나가고 싶었던 이 군은 주저 없이 전학을 선택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이 군은 여행사 직원이나 관광가이드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 호텔관광과를 선택한 이 군이 가장 먼저 도전한 게 칵테일 교육이었다. 그는 앞으로 커피와 와인, 카지노 교육을 받게 된다. 게다가 이 과를 마치면 관광통역안내원, 국외여행인솔자 같은 자격증도 딸 수 있다. 이 군은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삶의 목표 자체가 없었는데, 다솜학교에 와서 비로소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3학년인 그는 다솜학교 전교학생회장도 맡고 있다. 예전 학교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이 군은 “늦게 생긴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생겨 다행”이라며 “그 덕분에 공부도 할 수 있었고 자신감도 되찾았다”고 말했다.
○ “진학-특기 살리기, 두 토끼 잡았다”
이날 이 군의 칵테일을 칭찬해 준 조 양은 1학년으로 입학한 신입생이다. 중국 칭다오(靑島)가 고향이다. 현지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지난해 3월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들어왔지만 낯설고 말이 통하지 않아 공부, 일 모두 쉽지 않았다.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모습을 보다 못한 그의 어머니가 아는 사람의 소개로 피자집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다. 6개월간 그 피자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국말도 배우고 친구도 사귀었다.
그 후 조 양은 공부할 곳을 찾았다. 처음엔 미용이나 화장, 디자인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보다 나이도 많았고, 진학할 학교도 마땅치 않았다. 학교에서 따돌림 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바로 그 무렵 다솜학교 개교 소식을 들었다.
조 양은 컴퓨터미디어과로 입학했다.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어렴풋한 계획은 세워놓았다. 그는 요즘 매일 방과 후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고 있다. 만약 대학에 못 가더라도 ‘정보기술기초’ ‘멀티미디어’ ‘컴퓨터 구조’ 등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 과정은 어디를 가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컴퓨터그래픽운용기능사, 정보처리기능사 등의 자격증도 딸 수 있다.
그는 “1학년으로 입학해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다양한 기회를 찾아볼 수 있어 참 좋다”며 “중국어라는 특기를 살리는 진로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또 그는 “따돌림이 없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고 덧붙였다.
○ 다솜학교 3월 개교, 2개 과정 운영
서울시교육청이 3월 문을 연 서울다솜학교는 컴퓨터미디어과정과 호텔관광과정 등 2개 과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1학년 40명, 2학년 5명, 3학년 3명으로 모두 48명이 재학 중이다. 출신 국가는 중국(38명) 베트남(4명) 몽골(2명) 일본(1명) 등이다.
곽미란 교무기획부장은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목표로 다문화학생을 위한 특성화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9명의 이중언어 강사가 함께 수업에 들어가서 학생들이 언어 문제없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솜학교에서는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과 토요일을 활용해 종묘나 덕수궁 같은 곳을 찾고 한국문화의 집에서 한국무용, 탈춤, 사물놀이 등도 가르친다. 방과 후에는 수준별로 한국어 수업도 따로 진행한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