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출연한 탈북여성들 통해 위로 받고, 시청자 성원에 용기 얻어 ”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탈북자 문성림 씨. 탈북 과정에서 언니 2명이 인신매매단에 잡혀 갔고 그중 한 명을 11년 만에 한국에서 극적으로 만났다. 그는 소식이 끊긴 언니들을 행여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방송 출연 신청을 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탈북 여성들의 집단 토크쇼로 꾸려지는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 녹화 현장. 채널A 제공
언니가 북한에 있으면서 동생들 먹여 살리겠다고 고생 너무 많이 했지. 구리 장사 하다가 그 무거운 걸 떨어뜨리면서 손가락이 끼어 부러졌잖아.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았더라면 언니가 네 번째 손가락을 그렇게 못 쓰진 않았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상처가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파.
언니가 한국에 오게 되면 내가 언니 손가락 고쳐줄 거야. 언니 방송 보거나 하면 꼭 연락 줘. 어디서나 아프지 말고 힘내서 열심히 살면 우리 꼭 살아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지난달 29일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방송에서 문성림 씨(28)가 탈북 과정에서 헤어진 뒤 지금껏 소식을 모르는 셋째 언니에게 보낸 영상편지다. 문 씨는 통일이 되면 언니를 꼭 치료해 주고 싶다며 구급상자를 들고 나왔다.
‘이제 만나러…’는 이산가족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이들의 소망과 사연을 담은 물건을 타임캡슐에 담아 통일 이후까지 보관하는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부터 ‘현재진행형 이산가족’인 탈북자로 출연자 범위를 확대해 탈북 여성들의 집단 토크쇼를 내보내고 있다.
이산(diaspora)을 겪은 사람들이 TV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는 일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지금까지 언론이 비춘 탈북자들은 대부분 ‘도움이 필요한, 가엾은 대상’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 만나러…’ 출연자들은 이런 틀을 깨며 가감 없는 면모를 전한다. 거리낌 없이 막춤을 추는가 하면 남자 출연자들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출연진은 매회 15명 안팎이다. 이들 중에서도 문 씨는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사연으로 첫 출연부터 주목을 받았다. 채널A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에는 “문성림 씨 계속 출연시켜 주세요. 이야기 더 듣고 싶어요”(채종국 씨)라는 요청이 잇따르고, 문 씨의 출연분을 재편집한 동영상도 누리꾼들이 이리저리 퍼나르고 있다. 19일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문 씨를 만났다.
○ 중국 공안에만 4번 붙잡혀…“도망 전문”
“방송에 나가면 헤어진 언니들이 이걸 보고 절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직접 홈페이지에 제 사연을 올려 출연신청을 했어요. 전 좋은 물건 쓰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서 사는데 언니들은 어떻게 살까 많이 걱정돼요. 아직 연락은 없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문 씨는 함북 청진이 고향. 열네 살 때이던 1998년 중국에 시집간 큰언니가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 언니 2명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어머니는 5년 전 간경화로 세상을 뜬 상태였다.
“당시에 큰언니가 스무 살이었고, 그 아래로 저까지 하면 열여덟 살, 열여섯 살, 열네 살이었어요. 젊은 여자들을 데려갈 수 있으니 (인신매매단의) 집중 표적이 됐던 거죠.”
아버지는 어떻게든 딸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중국인들의 심부름꾼 역할을 했다. 중국인들은 북한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나오라는 지시를 아버지가 따르지 않자 문 씨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무차별 폭행했다. 문 씨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말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맞고 나서 또 북한에 심부름하기 위해 들어가셨다가 발각돼 수용소에 잡혀 들어가셨대요. 배탈이 났는데 치료를 받지 못해 화장실 갔다 돌아오시는 길에 쓰러져 영영 못 일어나셨다는 소식만 겨우 전해 들었어요. 돌아가신 날짜를 몰라요. 무덤도 없어요….”
불과 1년 사이에 문 씨는 아빠와 언니 3명과 모두 헤어져 15세 나이로 혈혈단신이 됐다. 한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거처를 구하긴 했지만 이후 그의 삶은 도망과 탈출로 점철됐다.
“중국 공안에 네 차례 잡혔어요. 두 번은 체포 과정에서 도망쳤고, 한 번은 한국 교회의 도움으로 풀려났죠. 마지막 잡혔을 때 끝내 북송됐어요. 수용소에서도 한 차례 탈출해 두만강에 뛰어들었는데 너무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했어요. 결국 주민 신고로 노동단련대로 끌려갔어요. 일하다가 허리라도 펼라치면 엄청나게 맞았어요. 너무 때려서 못 참고 도망 나와 다시 두만강을 건넜죠.” 2002년 그렇게 한국에 왔다. 열여덟 살 때였다.
○ 한국서 11년 만에 자매 상봉
한국에 온 지 7년째 되던 2009년, 문 씨는 둘째언니가 탈북해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니와 처음 통화하던 날, 둘은 아무 얘기도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다. 두 번째 통화하던 날에야 겨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헤어진 지 11년 만의 상봉이었다.
“언니와 가족 모두가 중국에 온 그날 밤, 중국인들이 택시에 태워서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중국남자와 결혼시키려 하더래요. 그래서 곧바로 맨발로 도망쳐 나왔대요. 조선족 집에 들어가 살면서 애 봐주는 일도 하고, 장사도 하면서 떠돌다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고 해요. 노동단련대에서 8개월형을 마친 뒤 곧바로 탈북했고요.” 언니는 지금 부산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힌 이야기다. ‘이제 만나러…’에서도 사회자와 ‘남쪽 사람’ 패널들이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중국 여행 갔다가 수면제 탄 음료수를 먹고 난데없이 인신매매로 팔려간 출연자, 여섯 살 된 아들을 북한에 두고 나온 뒤 13년째 아들 생일이면 옷가지와 신발을 산다는 출연자, 산속에서 4년을 떠돌며 살았다는 출연자, 꽃제비(집 없는 떠돌이 청소년)로 살면서 시장 바닥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으며 연명했다는 출연자…. 이런 사연을 전하는 당사자들이 오히려 담담하다. 목소리는 떨리고, 주춤거리며 말을 이어가면서도 눈물을 애써 삼키면서 의연하려고 애쓴다.
“스스로 아픈 기억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느끼려고 노력해요. 어쨌든 다 지난 일이잖아요. 아프다고 생각을 하면 한없이 아프거든요. 한국 온 사람 중에 고생 안 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함께 방송을 하면서 저 역시 위로와 위안을 받아요. 저보다 더 힘들게 오신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나마 행복하다고 느낄 때도 많아요.”
▶ [채널A 영상] “너희들은 이제부터 개” 탈북자 모녀 ‘충격 증언’
○ ‘공무원 돼 당당한 사회 기여’ 꿈꿔
문 씨는 한국에서 1년 반 동안 초중고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한 뒤 2005년 연세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외국인 전형을 통해서다. 문 씨에 따르면 매년 연세대에 입학하는 탈북자들은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 해 1명만 뽑은 적도 있다. 그런데도 대학생들 일각에서는 “좋은 대학 가려면 탈북해야겠다”며 비아냥거리는 시선도 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에요. 학점이 어느 정도 되면 등록금 지원도 되고 사실 많은 혜택을 받고 있어서 미안한 마음도 들어요. 특히 요즘은 대학생들이 학자금 대출 많이 받잖아요. 취직하면 빚부터 갚느라 뼈 빠지는데, 저는 저축이 없어도 빚은 없거든요. 도움 덕분에 배울 만큼 배웠고, 더 배우려고 노력할 수 있어 감사하지요.”
통일부에 따르면 집계가 시작된 이후 올해 4월까지 한국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은 모두 2만3568명이다. 2009년 한 해에만 2914명이 입국해 정점을 찍은 뒤 2010년 2401명으로 주춤했다가 다시 늘고 있는 추세다. 입국 시 1인 가구 기준으로 기본금 600만 원을 지급하며, 직업훈련과 취업장려금 등 장려금은 최대 2440만 원, 장기치료 등 가산금은 최대 1540만 원을 준다. 이와 별도로 주거지와 취업, 교육 지원도 해준다.
문 씨는 졸업 후 1년간 정보기술(IT)업체에서 기획자로 일하다 지금은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다. 서울시청에서 자신의 전공(행정학)을 살려 일하는 게 꿈이다. 함께 졸업한 탈북자 가운데 대기업에 입사해 일하는 친구들도 있다.
“탈북자들이 대량 입국하게 된 지 10년이 조금 넘었어요. 저처럼 탈북한 후 한국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새로운 탈북 세대가 생겨나고 있어요. 이들이 기반을 다지면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기여하는 시기가 올 겁니다. 실제로 ‘이제 만나러…’에 보내주시는 성원을 보면 제가 한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언젠가 탈북 청소년들 앞에 서서 그들이 닮고 싶은 롤모델로서 한국 사회에서 이룬 성취와 과정을 강의하는 게 제 꿈입니다. 조금만 더 지켜봐 주세요.”
● 시청자들이 남긴 말말말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꾸밈없는 이야기에 마음으로 느껴지는 재미가 있다.” ― 김효정
“지금껏 가졌던 탈북자들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됐던 것인지 깨닫게 됐다.” ― 박정미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 가족과 가정, 자유와 민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 김현태
“많은 걸 담아 간다.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는 프로그램이다.” ― 정윤일
“출연 여성들의 꿋꿋한 얼굴과 마음 때문에 어느 오락방송보다 따뜻하고 즐겁다.” ― 최윤주
“탈북자와 북한이라는 정치적 주제를 재미있고 감동스럽게 풀어 보여준다.” ― 박요셉
“탈북자들의 아픔을 국민적 관심사로 이어갈 수 있게 계속 노력해 달라.” ― 김상현
“이런 방송을 시청하는 일만으로도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 양승관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