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이 높을수록, 직장이 좋을수록 안정은 없다
이 과정을 한 번에 보여주는 예화가 있다. 한 여고에서 필자와 학생들이 나눈 100% 실제 대화다. “아직도 하루에 열두세 시간씩 수업을 받다니,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대학에 가려고요.” “대학은 왜 가는 건데?” “취업해야죠.” “취업하면?” “돈을 벌어야죠.” “그 다음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죠.” “그 다음엔?” “다시 아이를 교육시켜야 돼요.” 처음엔 당당했다. ‘당연한 걸 왜 묻지?’ 하는 식으로. 그러다 점점 뒤로 갈수록 학생들의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마지막엔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10년, 20년 후 자기 아이들도 이 자리에 앉아 이런 대답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가 막혔던 것이다. 아무리 안정을 원하기로 영원히 이런 쳇바퀴를 돌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이렇듯 우리 시대의 화두는 단연 ‘안정’이다. 학벌 불문, 세대 불문, 지역 불문, 이구동성으로 안정, 안정을 외쳐댄다. 하지만 보다시피 안정을 향한 이 질주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일단 이 레이스에는 도달 지점이란 것이 없다. 정상이 저기인가 보다 하고 정신없이 달려가 보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어떤 성적, 어떤 직업을 확보하면 “이제 됐어, 이젠 정말 안정을 찾았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성적이 높을수록, 직장이 좋을수록 안정은 없다! 결혼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 시대의 결혼은 가장 ‘불안정한’ 코스다. 부부관계를 지키는 것도, 부모 자식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고 또 어렵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사항 하나. 학벌, 직업, 결혼 등 안정을 보장해줄 거라고 믿는 이 세 개의 코드를 지배하는 ‘숨은 신’은 화폐다. 왜 공부를 하는가? 왜 정규직이 필요해? 왜 결혼을 하지? 이 모든 물음의 답은 ‘돈’이다. 하지만 세상에 돈만큼 불안정하고 돈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