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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흉물 취급받던 시장통 허름한 여관이 어느날 ‘마법의 성’으로

입력 | 2012-05-24 03:00:00

명문대 중퇴하고 제주올레길 게스트하우스 창업 28세 임성실 사장




“방황하고, 저지르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고…. 힘들지만 청춘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재래시장의 빈 여관을 인기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시킨 임성실 사장이 게스트하우스 입구에서 활짝 웃고 있다. 서귀포=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이곳, 제주 서귀포 구도심의 밤하늘은 아름답습니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사이로 비행기의 탐조등이 북으로 멀어지는 동안 바닷새들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재래시장 아케이드 위로 날아옵니다. 때때로 흰 새들이 무리를 이뤄 하늘을 휘젓다 사라질 때면 깊은 바다에 잠겨 물고기 떼의 유영을 바라보는 것 같은 나른한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흐드러진 봄바람을 맞으며 이런 멋진 밤 풍경에 잠겨 있는 건 오랫동안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엉킨 거미줄에 먼지 가득한 복도, 불 꺼진 객실들이 빼곡한 저는 재래시장 안의 버려진 4층짜리 여관입니다. 그런데 올해 봄은 사뭇 다릅니다. 임차인이 없어 10년간 빈 건물로 방치됐던 제게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오후면 서귀포 앞바다와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옥상에서 책을 읽고 기타를 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밤이면 여태껏 저 혼자 지켜보던 풍광을 함께 감상하기도 합니다. 한 해 사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버려진 저를 인기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시킨 나의 주인님, 임성실 씨(28)의 마술 같은 얘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
○ 취업 안 되면 창업하지 뭐!

처음 저를 찾는 분들은 두 번 놀랍니다. 시장 한복판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의 독특한 입지 때문에, 그리고 특유의 친화력으로 손님들을 맞는 앳된 사장님 때문이죠. 저를 ‘애물단지 여관 건물’에서 손님이 줄을 잇는 ‘슬리퍼(Sleeper) 게스트하우스’로 환골탈태시킨 사람은 올레꾼 사이에서 ‘미모의 20대 사장님’으로 통하는 성실 씨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실 씨, 알고 보면 괴짜입니다. 입학과 동시에 ‘취업스펙 쌓기’에 공들이는 요즘 학생들과는 달리 대학 시절부터 좌충우돌 사고뭉치였답니다.

고려대 경영학과 04학번으로 입학한 성실 씨는 ‘진짜 세상’과 몸으로 부딪치겠다며 3학년 때 휴학하고 영화배급사, 홍보대행업체, 잡지사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러가지 일에 도전합니다. 대부분 6개월을 못 넘기자, 창업으로 관심을 돌려 옷가게나 헌책방을 운영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실패가 계속되자 낙천적인 성실 씨도 우울해집니다. ‘다들 뭔가 되는 동안 난 영원히 방황만 하는 건 아닐까.’ 휴학과 복학을 몇 차례 거듭하면서 그녀의 학점은 바닥을 칩니다. 요즘 여대생들은 3점대 학점만 나와도 기겁을 하는데, 성실 씨는 대학 시절 내내 1점대 학점을 유지했답니다. 정말 희귀종이죠.

○ 헌 여관이 게스트하우스로

여기서 잠시 배경을 서귀포시로 돌리겠습니다. 1985년에 지어진 제가 외톨이 건물이 된 사연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이곳 서귀포는 1990년대 이후 주 수입원이던 감귤이 수입 개방, 풍작 등으로 가격이 폭락하면서 지역경기가 침체기를 맞습니다. 관광산업도 성수기를 빼고는 쇠락합니다. 매일올레시장 등 서귀포 구도심 일대 상권은 눈에 띄게 활기를 잃었고, 리조트나 펜션이 인기를 끌며 저처럼 오래된 여관은 흉물이 됐습니다.

그런데 웬일인가요. 2009년경 뜻밖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가방을 둘러멘 등산복 차림의 외지인들이 한두 명씩 나타나면서 거리에는 새로운 활기가 감돌기 시작합니다. ‘올레길’ 덕분이었습니다. ‘올레’란 집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랍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스페인 ‘산티아고 길’에서 착안해 2007년 제주 해안지역, 오름, 들길을 가로지르는 코스를 개발했고, 이를 올레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성산의 시흥초등학교에서 광치기 해변까지 약 15km 거리인 1코스가 나온 이후 제주 전역에 다양한 코스가 개발됐습니다. 매일올레시장을 비롯해 이중섭거리, 서귀포항 일대가 올레길 6코스로 지정된 게 바로 그 무렵이었답니다. 올레길이 인기를 끌며 제주를 찾는 자유여행객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습니다.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 걷는 올레꾼들의 발길은 6코스를 따라, 자연히 이곳으로까지 와 닿게 됐습니다.

여름방학 기간 고향 제주에 내려와 있던 성실 씨는 올레꾼의 여행문화를 흥미롭게 관찰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코스의 시작 혹은 끝 지점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특히 저렴한 가격에 숙박을 해결하면서도 다른 여행객들과 정보와 친분을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선호했지요. 이들에게 필요한 건 게스트하우스였지만 서귀포시 구도심엔 그런 수요를 충족할 숙소가 없었습니다.

올레길 6코스가 지나는 시장 아케이드 한편에 부모님 명의의 빈 여관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성실 씨 가슴은 주체할 수 없도록 뛰었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제가, 성실 씨에겐 마치 킹스크로스역 승강장을 지나 마주친 해리 포터의 ‘마법의 성’처럼 느껴졌답니다.

○ 8시간 청소하며 기본기 다지기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제 상태가 엉망진창이었어요.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지 10년이 다 된 탓에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물탱크가 깨지고 성한 곳이 없었어요. 리모델링 비용 마련이 급했습니다. 학교도 고민이 됐습니다. 성실 씨가 사업 준비를 위해 자퇴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결사반대했습니다. 농부 아버지, 해녀 어머니 사이에서 늦둥이 외동딸로 태어난 성실 씨는 “힘들게 들어간 좋은 학교를 왜 관두느냐. 남들처럼 졸업해 번듯한 직장에 취직할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거냐”며 서럽게 우는 부모님 앞에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답니다.

일단 ‘졸업도 하고 취업도 하겠다’고 달래드린 뒤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지만 결심이 확고했던 성실 씨는 차근차근 창업 준비에 착수합니다. 청년 창업지원금을 받을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숙박업은 창업 지원 대상 업종이 아니더군요. 성실 씨는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보려고 떠난 영국 여행에서 돌파구를 찾습니다.

호스텔, B&B(Bed&Breakfast·숙박과 아침식사)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는 다양한 호스텔이 공존했습니다. 특히 에든버러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그라피티(스프레이 페인트로 벽에 그린 그림)로 장식한 자유분방한 호스텔을 본 뒤 굳이 돈을 들이지 않아도 특색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습니다. 부모님 몰래 제주의 다른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면서 방 청소, 고객 응대법 등 운영 노하우를 익혔습니다. 방 30개짜리 게스트하우스를 8∼9시간 청소하면서 파김치가 됐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견뎠답니다.

○ 10개월간 다녀간 손님 3500명

휴게실을 가득 채운 책들은 ‘슬리퍼 게스트하우스’의 최대 자랑거리다. 1박에 2만 원인 도미토리룸, 간단한 취사가 가능한 공용 부엌도 갖추고 있다(위쪽부터). 슬리퍼 게스트하우스 제공

드디어 지난해 5월 성실 씨는 강의실 밖을 쏘다니며 쌓은 다양한 인맥을 동원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저를 탈바꿈시킵니다. 페인트칠, 간판 제작, 홍보를 지인들의 ‘품앗이’로 충당했습니다. 초기 투자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 개 층만 객실로 썼고, 리모델링 비용은 1000만 원대에서 해결했습니다. 7월 정식 오픈 이후 최근까지 약 10개월 동안 저를 찾은 여행객은 3500명이 넘었습니다. 대성공입니다.

지하철 기관사, 항해사, 119 구조대원, 금융투자회사 임원, 남자 간호사 등 손님들의 직업은 다양하지만 이들이 올레길과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이유는 비슷합니다. 지친 일상을 돌아보고 재충전할 힘을 얻는 것, 잃어버린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기 위함이죠.

방황이라면 도가 텄다고 자부하는 성실 씨는 휴게실에 그간 모은 500여 권의 책을 비치하고 독서치료사 역할을 자청하기도 합니다. 취업을 앞두고 고민 중인 학생들에겐 법륜 스님의 ‘방황해도 괜찮아’를, 목적 없이 사는 것 같다고 느끼는 30대 직장인에겐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등을 권해주는 식이죠. 참, 학교는 올해 봄 제적당하며 그만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해졌는데 학벌, 졸업장에 연연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성실 씨는 “대학 시절 내내 이안류(離岸流)에 휩쓸려 망망대해를 떠다닌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황이 있었기에, 꿈은 수많은 직간접 경험을 통해 구체화되는 거란 걸 배웠지요. 도전하고 깨지고 난 뒤면, 또 새로운 길이 보이는 거죠. 요즘 성실 씨는 지역의 문화예술인들과 축제 기획 등을 하느라 분주합니다. 슬리퍼 게스트하우스를 문학, 음악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의 아지트로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올레꾼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귀포를 찾았다가 즐길 만한 놀이가 부족해 금방 떠나는 것이 늘 아쉬웠기 때문이라네요.

아마 올 하반기면 이곳은 또 한 번의 리모델링에 들어갈 겁니다. 버려진 여관이 인기 게스트하우스로, 이제 꿈과 희망, 열정을 교류하는 문화공간으로의 변신을 꿈꿉니다. 청과물가게 건어물가게가 즐비한 재래시장. 허름한 옛 여관으로 배낭을 둘러멘 젊은 여행객들이 땀을 흘리며 찾아올 때마다, 예전의 저를 기억하는 상인분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실 씨의 꿈, 그리고 저의 진짜 변신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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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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