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정치부장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18일자 A5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아버지의 후광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않았다는 점은 누구보다 김 지사가 잘 안다. 김 지사는 최근 사석에서 “박 대표(비대위원장)는 어린 나이에 청와대에서 권력을 접하고 퍼스트레이디까지 해서 정치와 권력의 생리를 거의 본능적으로 안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도 조기교육이 무서워
내가 박 전 위원장을 ‘정치 고수(高手)’라고 느낀 건 10년 전 이맘때부터였다. 2002년 4월 파리특파원이었던 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열린 한영포럼을 취재했다. 포럼에 참석했던 박 전 위원장을 인터뷰하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는 콘텐츠 빈약이었다.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당시는 정치에 입문한 지 몇 년 안 된 터여서 깊은 공부가 부족했으리라. 둘째는 그 빈약한 콘텐츠로 거의 ‘정답’을 말하는 놀라운 균형 감각이었다. ‘이래서 조기교육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한국 골프가 세계를 휩쓰는 건 조기교육 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어깨가 굳기 전에 체화된 유연한 스윙을 뒤늦게 배워 따라가기 어렵다는 걸 골프를 해 본 사람은 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출세하기 위해, 혹은 돈은 있지만 부족한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나중에 정치에 뛰어든 이들과 조기교육을 거쳐 정치가 체화된 박 전 위원장의 ‘스윙’은 차원이 다르다. ‘어깨에 힘 들어가면 망한다’는 이치는 골프나 정치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고수들이 종종 빠지는 함정에 있다. 고수는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어쩌면 별로 들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남의 말을 들어봐야 자신의 판단을 뛰어넘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드물지 모른다. 항간에는 아무 아무개가 ‘박근혜의 멘토’라는 얘기도 있지만 내가 알기론 사실과 다르다. 박 전 위원장은 철저하게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일을 나눠주고, 얘기를 들어주는 스타일이다.
고수들이 종종 빠지는 함정
측근이라도 함부로 자신의 판단이나 해석을 들이밀었다가는 정 맞기 십상이다. 한때 친박 핵심이었던 김무성 유승민 의원이 박 전 위원장과 소원해진 주요 이유다. 박 전 위원장은 이정현 의원처럼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스피커’ 타입을 선호한다.
박 전 위원장의 이런 스타일 때문에 그가 집권할 경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린다. 대통령이 남의 말을 잘 안 들으면 국가적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 전 위원장의 스타일은 소통과는 거리가 멀었던 전성기의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와도 겹친다. ‘대세론’을 업고도 두 번이나 대선에서 패한 주요 원인으로 소통 부족이 꼽히지 않았는가. 이 전 대표는 대통령 자리가 멀어진 뒤에야 ‘정답 이회창’이란 평가를 들을 정도로 귀를 열었다. 애석하게도 너무 늦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