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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제균]高手 박근혜의 함정

입력 | 2012-05-25 03:00:00


박제균 정치부장

“박근혜 리더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 리더십이다. …하지만 국정운영을 후광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18일자 A5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아버지의 후광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않았다는 점은 누구보다 김 지사가 잘 안다. 김 지사는 최근 사석에서 “박 대표(비대위원장)는 어린 나이에 청와대에서 권력을 접하고 퍼스트레이디까지 해서 정치와 권력의 생리를 거의 본능적으로 안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도 조기교육이 무서워

5·16으로 박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게 박 전 비대위원장 아홉 살 때다. 스물두 살에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서거로 퍼스트레이디까지 됐다. 시쳇말로 ‘조기교육’을 받은 건데, 그 과목이 정치다.

내가 박 전 위원장을 ‘정치 고수(高手)’라고 느낀 건 10년 전 이맘때부터였다. 2002년 4월 파리특파원이었던 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열린 한영포럼을 취재했다. 포럼에 참석했던 박 전 위원장을 인터뷰하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는 콘텐츠 빈약이었다. 주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당시는 정치에 입문한 지 몇 년 안 된 터여서 깊은 공부가 부족했으리라. 둘째는 그 빈약한 콘텐츠로 거의 ‘정답’을 말하는 놀라운 균형 감각이었다. ‘이래서 조기교육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한국 골프가 세계를 휩쓰는 건 조기교육 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어깨가 굳기 전에 체화된 유연한 스윙을 뒤늦게 배워 따라가기 어렵다는 걸 골프를 해 본 사람은 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출세하기 위해, 혹은 돈은 있지만 부족한 명예나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나중에 정치에 뛰어든 이들과 조기교육을 거쳐 정치가 체화된 박 전 위원장의 ‘스윙’은 차원이 다르다. ‘어깨에 힘 들어가면 망한다’는 이치는 골프나 정치나 마찬가지다.

박 전 위원장은 2004년과 올해 두 번의 총선 직전에 빈사상태의 당을 맡아 사실상 당을 구했다. 2004년 ‘천막당사’ 이사는 ‘고수 박근혜’의 정치 내공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특히 이번 총선에선 수도권보다 충청과 강원을 집중 공략해 판을 뒤집었다. 그만큼 ‘민심의 수읽기’에 능란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것. 무엇보다 2007년 경선 승복 드라마 연출은 ‘초절정 무공’의 결정판이었다.

문제는 고수들이 종종 빠지는 함정에 있다. 고수는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어쩌면 별로 들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남의 말을 들어봐야 자신의 판단을 뛰어넘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드물지 모른다. 항간에는 아무 아무개가 ‘박근혜의 멘토’라는 얘기도 있지만 내가 알기론 사실과 다르다. 박 전 위원장은 철저하게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일을 나눠주고, 얘기를 들어주는 스타일이다.

고수들이 종종 빠지는 함정

측근이라도 함부로 자신의 판단이나 해석을 들이밀었다가는 정 맞기 십상이다. 한때 친박 핵심이었던 김무성 유승민 의원이 박 전 위원장과 소원해진 주요 이유다. 박 전 위원장은 이정현 의원처럼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스피커’ 타입을 선호한다.

박 전 위원장의 이런 스타일 때문에 그가 집권할 경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린다. 대통령이 남의 말을 잘 안 들으면 국가적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 전 위원장의 스타일은 소통과는 거리가 멀었던 전성기의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와도 겹친다. ‘대세론’을 업고도 두 번이나 대선에서 패한 주요 원인으로 소통 부족이 꼽히지 않았는가. 이 전 대표는 대통령 자리가 멀어진 뒤에야 ‘정답 이회창’이란 평가를 들을 정도로 귀를 열었다. 애석하게도 너무 늦은 뒤였다.

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