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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한 그 사람]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단국대 석좌교수

입력 | 2012-05-25 03:00:00

사랑방에서 한문책 가르쳐 주시던 할아버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6·25전쟁 이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2학년 때 참혹한 전쟁을 겪으며 포화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기본적으로 가난했지만 종갓집이어서 위토답이 약간 있었기 때문에 끼니를 많이 거르지는 않는 생활을 했다. 그 무렵 우리 집 사랑방은 손님들로 날마다 만원이었고, 아무리 적을 때도 손님 한두 분은 항상 계셨다. 사랑방 주인은 우리 할아버지로 보발을 하고 갓을 쓰시면서 유학자이자 선비로서의 본모습은 잃은 적 없이 살아가셨다.

초등학교 4, 5학년이 되자 어른들의 대화 내용을 상당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우리 사랑방은 화기애애한 대화와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칠 때가 없었다. 대부분 유학에 식견이 높던 할아버지의 친구 분들의 대화는 진지했다. 손님이 안 계시는 날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부자(父子)간의 대화가 사랑방에서 이어졌다. 유교경전에 대한 이야기, 조선왕조 명유(名儒)들에 관한 이야기, 증조할아버지의 스승이었던 면암 최익현과 송사 기우만 이야기 등 인물과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조선시대 명문가들의 인물과 학문적 전통, 학맥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구수하게 들렸다. 전라도 지방의 성씨(姓氏)에 관한 이야기나 조선시대 유명한 집안들의 가통이나 인물들에 대한 보학(譜學)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서 빼놓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할아버지가 친구 분들과 함께 읽으시면서 토론하던 한문(漢文) 글의 내용이야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보학 이야기는 그래도 귀에 쏙쏙 들어오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밤에는 언제나 할아버님 앞에 무릎을 꿇고 ‘추구(推句)’ ‘학어집(學語集)’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아동용 한문책을 배웠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할아버지 곁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했지만 주말이나 방학 때는 또 할아버지 친구 분들과의 사랑방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부자지기(父子知己)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글 읽기나 학문 토론을 엿들으면서 나의 식견도 상당히 높아졌다. 어느 방학 때는 ‘소학(小學)’이라는 책을 배우기도 했지만, 사랑방 대화에서 얻어 듣던 내용은 유교나 유학에 흥미를 잃지 않을 기회를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주말이나 방학 때는 학교에서 약간씩 배우던 조선의 역사나 유학사상에 대해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여쭙고 배우면서 식견은 더 넓어졌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조부님은 세상을 뜨셨다. 스승을 잃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해 할아버지 시신을 입관하던 날 나는 통곡하다 기절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메고 눈이 퉁퉁 부을 지경이었다. 당시 나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방을 비우시자 아버지가 사랑방 주인이 되셨다. 모든 역할이 아버지에게 넘어가자 아버지와 나의 부자간 토론이 이어졌다. 형제지기(兄弟知己)였던 아버지와 계부(季父)께서 대화와 토론에 참여하시면서 할아버지 생전의 사랑방 대화는 다시 복원될 수 있었다.

한문 해독에 넉넉하시던 아버지 형제가 한문 글을 읽고 해석하는 데 참여하면서 나의 한문 해독력도 상당히 발전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대한 글 보기는 대강 마쳤고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강독이 시작되던 대학원 시절에는 글 읽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주자학(朱子學) 일변도의 우리 사랑방 대화는 실학의 논리로 비약하면서 나의 한문 공부는 제법 진보하고 있었다. 사면의 벽이 고서(古書)로 가득했던 우리 사랑방, 그곳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계부의 독서와 토론이 겸해지면서 전통과 현대를 잇는 온고지신과 법고창신의 논리가 살아나고 있었다.

오늘의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 계부 등의 사랑방 글 읽는 소리와 함께했던 이유로 존재하게 됐다. 이제는 세 분 모두 고인이 되셨다. 풍수지정(風樹之情)을 잊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분위기에서 한문 해독력이 커졌기 때문에 다산 정약용 공부도 하면서 오늘의 내가 서 있다. 그때 더 열심히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단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