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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人]‘그림 읽어주는 여자’ 미술가 한젬마씨 “‘법정스님 ‘절제의 가르침’ 제 평생의 나침반입니다”

입력 | 2012-05-26 03:00:00


한젬마 씨의 이름 ‘젬마’는 세례명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지만 천주교 못지않게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법정 스님을 무척 존경한다는 한 씨는 스님을 떠올리며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예중, 예고를 나와 미대에 진학했고 곧바로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제 인생은 미술로 결정됐고, 단 한 번의 쉼표도 없었죠. 대학원 졸업할 때쯤 문뜩 ‘왜 그림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질문은 ‘왜 사나?’로 번져갔고, 그때 법정 스님의 책을 접하게 됐지요.”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알려진 미술가 한젬마 씨(42)는 어릴 적부터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이 그려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런 그에게 단순한 삶과 투철한 자기 절제가 담긴 법정 스님의 가르침은 큰 울림을 줬다. 스님의 여러 저서 중 ‘산에는 꽃이 피네’(문학의 숲)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은 듣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며, 먹지 않아도 좋을 음식은 먹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그가 지금도 자주 곱씹는 문구다.

한 씨는 법정 스님과 두 차례 직접 만났다고 했다. “책도 내고 방송도 하면서 한창 바쁘게 일할 때 스님을 뵈었어요. 스님은 제게 ‘항상 조심하고 절제하면서 살라’고 하셨죠.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저는 ‘좋은 말씀이지만, 나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나이가 들고 인생의 힘든 순간을 겪을 때마다 스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됐어요.”

법정 스님이 그의 삶에 나침반 역할을 했다면, 원로조각가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80)는 예술인으로 그의 정체성을 잡아준 스승이다. 최 교수와는 직접 만난 적이 없고 단지 책을 통해서만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최 교수가 60대 이후 보고 들은 작품과 사람들의 이야기, 그에 대한 사색 및 통찰을 담은 책 ‘나의 미술 아름다움을 향한 사색’(열화당)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는, 혹은 미술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권했다.

“메시지는 단순해요. 미술인이기에 앞서 사람이 돼야 하고, 그 사람의 됨됨이가 작품에 담겨야 한다는 거죠. 최 교수님의 글과 조각 작품은 고도로 정제된 소금 같은 느낌이에요. 고유의 재료성을 살리면서 더 이상의 조미료가 필요하지 않게 하는 소금. 저도 그런 사람, 그런 작가가 돼야겠다고 다짐했죠.”

1995년 첫 개인전을 하면서 미술계에 입문한 한 씨는 1999년 ‘미술 읽어주는 여자’를 펴내며 스타덤에 올랐다. 서울대 미대 출신의 학벌과 미모, 톡톡 튀면서도 조리 있는 말솜씨는 그를 미술 전문 방송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그는 2006년 말 저서 대필 논란에 휘말렸다. 임신 3개월 때였다. 이후 인생의 길이 달라졌다. 이때 그에게 영향을 준 책이 바로 미국 대공황 시기에 뉴욕을 떠나 버몬트 시골 숲에서 20년간 지낸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가 쓴 ‘조화로운 삶’(보리)이다.

“니어링 부부는 흙과 소통하며 살았어요. 과일과 채소, 곡식을 직접 재배하며 자급자족했죠. 삶의 태도를 바꾼 건 결혼 8년 만에 태어난 딸의 영향이 가장 컸어요. 내가 그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삶을 아이가 산다고 대입해보니, ‘이게 아니구나’ 싶었죠.”

집 마당에 조그만 텃밭을 꾸려 채소를 기른다는 그는 최근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농부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원예를 좋아했지만, 농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자연과의 교감, 생태계의 위기, 생명의 소중함 등을 배웠다고 한다. “전 도시에 사는 예술가고, 지금도 활발히 작업을 하고 있어요. 여전히 일에 대한 욕심이 있고요. 하지만 아이와 함께 흙을 보면서 하루하루의 변화를 느끼는, 그 소중한 시간을 건너뛰면서까지 살고 싶진 않아요. 그런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