可: 가할 가 就: 나아갈 취 見: 뵐 현 不: 아닐 불可: 가할 가 屈: 굽을 굴 致: 이를 치
당시 유비는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를 만나러 온 서서가 와룡(臥龍)인 제갈공명을 만나 보라고 조언하자 유비가 서서에게 데리고 올 수 없겠냐고 했다. 그러자 서서가 바로 이 말을 하고는 장군께서 몸을 굽혀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세 차례나 찾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유비는 옆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붕괴 직전인 한 왕실의 상황을 말하면서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지만 천하에 대의(大義)를 펼치고자 하니 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제갈량은 유비가 자신의 낮은 신분에 괘념치 않고 세 차례나 몸을 굽혀 찾아온 데 감동했다. 그리고 당시의 형세를 일목요연하게 분석하면서 조조가 북방의 원소를 무찌르고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시운(時運) 때문만이 아니고 인모(人謀)도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과 강동의 손권은 이미 3대째에 이르러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으므로 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과거 고조가 제업(帝業)을 세웠던 익주를 근거지로 하여 천하를 도모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고 대안을 내놓았다. 한 가지 걸림돌은 익주는 이미 유장(劉璋)이란 자가 차지하고 있으나 그가 우매하고 유약하며 민심을 별로 얻고 있지 못하고 있으므로 별 무리 없이 그곳을 차지할 것이라는 구체적 방법까지 제시했다. 유비는 감탄했다. 당시 제갈량이 겨우 이십대 후반의 나이였으니 말이다. 이후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軍師)가 됐고 오나라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여 삼국정립(三國鼎立)의 초석을 다졌다. 두 사람은 수어지교(水魚之交)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군신 관계의 모범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