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詩作 뒷바라지해준 천사같은 아내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마침 우리에겐 올해가 결혼 50주년이다. 50년간 나를 허락해 온 그가 우선 고맙기 그지없다. 함경도 군관 나신걸(羅臣傑)이 아내에게 보냈다는 500년 전의 그 애절한 편지나 ‘분곽과 바늘 여섯’ 같은 선물을 한 번 제대로 건넨 적도 없다. 그런 내게 당연한 일처럼 내 시작(詩作)의 기미가 엿보이면 미리 내 영혼의 차디찬 구들을 늘 군불로 예열해 놓을 줄 알았던 그의 마음 씀씀이를 젊은 시절 시에서 영매(靈媒)라는 말로 고마워했던 적이 한 번 있기는 있었다. 그럼에도 50주년 되던 날, 몰려온 우리 아이들이 차려준 따뜻한 저녁상 앞에서 그간의 세월이 하도 귀해서 50년이란 말을 반백년(半百年)이란 표현으로 바꾸면서 그저 당신의 그간의 희생이 고맙기만 했다는 나의 말에 ‘젖은 손이 애처로워’ 식으로 그렇게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이 사실은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 아내의 응답이었다. 서로의 ‘견딤’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했다고 해야 옳다고 했다. 예술가들에게는 특별한 개인주의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누구 하나가 견딤을 포기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라고 했다. 하기는 그런 아내의 견딤을 바라보기만 했던 나의 염치없음도 견딤이라면 견딤일 수도 있겠다.
단칸방 시절 시인들을 끌고 와 새벽까지 담론풍발 소주타령으로 밤을 지새우기가 다반사였을 때 부뚜막에 기대 졸다가 아침상 차려주고 부랴부랴 자신은 학교로 출근하곤 하던 그였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무슨 자랑이랍시고 고백해 두어야 할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솔직함을 가장해 내가 좀 편해지겠다는 수작이다. 이미 아내가 그의 산문집 ‘빈 하늘에 걸린 빨랫줄 하나’에서 잠시 건드렸던 내용이다. 아내가 출산하고 누워 있을 때 어린아이에게 쑤어 줄 미음의 쌀마저 똑 떨어졌던, 그렇게 어려웠던 우리들의 준비 없던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다. 쌀을 팔아오라고 아내가 내어준 돈을 가지고 나가서 밤늦도록 나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내와의 가정생활은 고사하고 남의 세계에 적절히 양보하고 동화됨으로써만 내가 제대로 된 사회적 주체가 된다는 마이너스적 역설의 진실은 염두에도 없었던 그 시절의 나였다. 그게 시인의 포즈인 것으로 착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러니 관례나 상식을 떠난 행동을 늘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쌀 팔 생각은 까맣게 잊고 그 돈으로 시인들과 어울려 술을 퍼먹고 있었다. 아찔하다. 어떻게 아기마저 잊고 있을 수가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내가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지금 우리들은 시골 선영의 묘지기 내외로 살고 있다. 내 나이 칠십, 종심소욕(從心所欲)의 내 노과(老果) 시편들이 아직 긴장을 놓지 않았고, 아내는 어제 읍내 장터 대장간에서 새로 자루를 바꿔온 호미로 오늘도 뒤뜰 텃밭을 매고 있다.
정진규 시인·현대시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