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파’ 과정 학생들 “우리는 두더지… 2년간 밤낮없이 공부”
5월 29일 프랑스 파리 루이르그랑의 ‘명예의 정원’에서 학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학교 건물이 사각형으로 둘러싼 공간에는 ‘빅토르 위고 광장’으로 이름붙인 운동장과 명예의 정원 등이 있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1562년에 설립돼 500년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 파리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에는 이처럼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학교가 배출한 철학자 정치인 수학자 등도 끝이 없다.
학교는 파리 중심 카르티에 라탱 지역 소르본대 건너편에 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작지만 중후한 정문, 현관만으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이 그대로 전해진다. 좁은 정문을 지나 교정으로 들어서자 이 학교 출신인 19세기 유명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가 직접 쓴 책과 편지 등이 유리 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다.
수업은 교사가 준비해온 내용을 칠판에 한가득 쓰고 설명한 후 학생들과 문답하면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들은 교과서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강의를 하다가 어떤 학생이 궁금한 것을 묻거나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면 교사는 학생들이 그걸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다양한 사례와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학생들과 토론을 한다. 교사의 수업 내용만 제대로 이해하고 따라가면 더 부족한 게 없을 정도다. 약 1주일에 한 번씩 교사는 학생과 일대일 구술시험을 보고, 강도 높은 과제와 프로젝트를 매번 제시한다.
이 학교를 최고 명문으로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수준 높은 교사진이다. 이 학교 교사는 전공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교원들 중에서 교육부 장학사가 직접 선발한다. 교사들의 주당 평균 수업 시간은 약 10시간에 불과하다. 나머지 시간은 수업 연구, 과제물 검토, 생활지도 등으로 보낸다. 한국의 경우 교사들이 수업 이외에 다른 행정 업무가 많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수업과 행정을 분리해 운영한다.
루이르그랑의 1학년 과정은 학생 전원이 공통으로 듣고, 2, 3학년은 각각 문과 1개반, 이과 8개반으로 운영된다. 2, 3학년에는 이과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만 모아놓은 이른바 ‘영재반’이 한 반씩 있다. 영재반은 시험을 봐서 들어가는 것도, 본인이 원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학생의 평소 성적과 학습태도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 담임교사와 학생관리주임 등이 모여 결정을 한다. 학생의 시험 성적만으로 결정하기보다는 성적과 생활태도, 진취성과 노력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한다.
이영주 KAIST 연구원
이 학교는 수학 과학 교육의 세계화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프레파 과정은 매년 정원의 15% 정도를 외국 학생으로 뽑는데 수학 실력 위주로 선발한다. 이는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이 서로 어울리게 해 시너지 효과를 올리기 위한 것이다.
루이르그랑은 특히 아시아 국가와 활발한 국제교류가 이뤄지고 있는데 중국 베이징(北京)에 ‘루이르그랑 프로그램 센터’를 설치했다. 베트남과는 ‘그랑제콜 컨소시엄’을 만들어 3개 도시에서 프랑스 과학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도 6개의 영재교실을 운영해 프랑스의 수학 과학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루이르그랑은 수학 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하면서도 문화 예술 등 인문학적 소양 교육에도 비중을 두고 있다. 학과 외에 다양한 클럽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 이는 원만한 인격 함양뿐만 아니라 창의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교육철학이 깔려 있다. 기자가 방문한 5월 29일 점심시간에도 교내 ‘빅토르 위고 광장’ 등지에서 농구를 즐기는 학생들이 많았다. 광장 옆에는 꽃과 나무로 아름답게 꾸며진 ‘명예의 정원’이 있다. 농구 코트 옆 육상트랙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달리고 있었다.
루이르그랑 고교의 한 교실 칠판에 교사가 써놓은 수식이 가득하다. KAIST 과학영재교육연구원 제공
▼ 한국인 유학생 박현선 씨 “모르는 게 생기면 끊임없이 토론… 수학이 즐거워요” ▼
루이르그랑의 그랑제콜 준비반(CPGE) 2학년 이과반에 다니고 있는 박현선 씨(20·사진). 그는 5년 전 이 학교에 입학해 고교과정 3년을 마치고 치열한 경쟁 끝에 ‘프레파’로 불리는 CPGE에 합격해 공부를 계속하고 있지만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선생님은 자꾸 묻는 학생을 높이 평가합니다. 한국 같은 학원이 없어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끼리 학교에 남아 함께 공부나 과제를 하고 집에 와서도 수시로 선생님과 연락하며 안 풀리는 문제를 물어봅니다.”
박 씨는 2001년 수원 송원초교 4학년 시절 어머니, 언니와 파리로 조기유학을 왔다. 거주지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온 뒤 내신과 서류전형으로 루이르그랑에 합격했다. 자신의 중학교에서 합격자는 2명뿐이었다.
시험은 한 번에 보는 게 아니라 과목별로 한 과가 끝날 때마다 본다고 한다. 보통 3주에 한 번씩 시험을 보게 된다는 것. 시험점수와 등수는 과목별로만 매겨지고 담임선생님과 학생관리주임, 학생대표 반장이 모여 하는 학생평가회의에서만 공개된다고 한다.
박 씨는 “고교 과정보다는 프레파 과정이 입학부터 수업, 시험까지 훨씬 어렵고 경쟁이 치열하다”며 “수학을 좋아하는 한국 학생들의 입학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공계 분야 최고인 에콜 폴리테크니크나 에콜 상트랄 같은 그랑제콜에 진학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 씨는 “루이르그랑은 공부만 시키는 학교가 아니다”라며 “오전만 수업하는 수요일, 토요일 오후는 학교가 학생의 체육, 음악, 미술, 연극 등 각종 클럽활동을 장려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한다”고 말했다. 주당 평균 수업시간은 32∼35시간. 박 씨는 배구클럽에서 활동하며 파리와 수도권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의 심판까지 볼 수 있는 심판자격증도 획득했다. 그랑제콜 입학시험을 치르는 요즘도 다음 달 있을 연극공연에서 조명 파트를 맡아 수시로 연습에 참여한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바로잡습니다]
◇1일자 A8면 박현선 씨 인터뷰에서 ‘통원초교’를 ‘송원초교’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