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석, 자연 속의 시간 VI(생명의 근원). 작가 제공
몇 살 때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어느 날, 꼬마였던 저는 원초적이고 존재론적인 공포를 생애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그 무렵 낮잠을 자다 깼는데 방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혼곤했지만 이상하게 천장의 벽지 무늬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왜 사방연속무늬가 숨 막히게 퍼져 나가는 옛날 벽지 말입니다. 그때 갑자기 ‘나는 누구고 뭔가?’라는 뜬금없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습니다. 지금 눈을 떠서 나를 의식하는 내가 나인가? 그럼 좀 전에 잠들어 있던 나는 어디 있었나? 만약 내가 죽으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거지? 그러자 생애 최초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칼끝처럼 예리하게 느껴졌습니다. 온몸이 오싹해졌어요. 시선을 둔 천장 벽지의 사방연속무늬를 따라가다 보니 마치 제 죽음 너머의 무한대의 우주 또는 시간이 저를 옥죄어 오는 듯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무의미한 존재로 느껴지니 낯선 공포와 전율을 느꼈던 겁니다. 저는 너무도 억울했어요.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건가? 그럴 리 없어.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리 없어. 다만 내가 잠이 들었을 때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죽음 후에도 ‘또 다른 나’인 내가 되어 있을 거야. 그럼 지금의 나는? 그건 내가 기억 못하는 누군가의 죽음 이후의 나인가? 지금 나 이전의 그 누군가가 또한 나인가? 이렇게 끊임없이 사방연속무늬처럼 이어지는 질문을 숨 가쁘게 하다가 드디어 저는 공포에 질려 발작하듯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불교 사상인 전생과 윤회에 대해 막연히 눈을 떴던 게 아닌가 싶어요. 기독교가 ‘신은 무엇인가’에 몰두한다면 불교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종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저마다 살아오면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거예요. ‘나’라는 존재, 생각할수록 풀리지 않는 오묘하고 신비한 화두지요. 그걸 깨닫기 위해 2500여 년 전에 태어난 석가는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고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었지요.
오늘 소개하는 이 그림을 보니 소설가 김성동의 ‘만다라’에 나왔던 불교의 화두 하나가 떠오르네요. 어린 새를 목이 좁은 호리병에 넣어 키웠더니 어느새 새가 자라서 병 밖으로 꺼내기 힘들어졌어요. 병을 깨뜨리자니 병은 아주 귀중한 보물이라 깰 수 없고 그냥 두면 새를 죽이게 생겼답니다. 어떻게 하면 병을 깨뜨리지 않고 새를 꺼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답을 듣고 싶네요.
재미있는 답을 내놓은 사람들도 있어요. 유리공예를 배워서 병의 주둥이를 부풀려 새를 꺼낸다. 또는 새를 다이어트 시킨다. 새를 꺼낼 수 없다면 알을 까게 해서 새끼를 꺼낸다. 저는 마지막 답이 꽤 마음에 듭니다. 새는 알이고 알은 또 새니까요. 색은 즉 공이고 공은 즉 색이니라. 뭐 이런 알쏭달쏭한 불교의 문법대로 하자면 말입니다.
이 그림 속의 새는 생명의 근원인 커다란 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알 속에 또한 하나의 자연, 하나의 우주가 들어 있네요. 향기롭고 아름다운 연꽃 세상이 말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하다못해 그 생명이 품고 있는 알도 또한 소우주를 품고 있는 이 화엄의 세계가 바로 부처의 세계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말이죠. 품고 있는 저것이 정녕 알일까요? 마음일까요? 이 그림은 심안(心眼)으로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권지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