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이야기/폴린 레아주 지음·성귀수 옮김/296쪽·1만2000원·문학세계사
에로티시즘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 책은 한때 ‘빨간 딱지’가 붙은 성인물처럼 취급됐다. 1980, 90년대 조악한 해적판으로 코밑이 거뭇해진 사춘기 소년들이 호기심에 들춰봤다. 하지만 뒷방에서 혼자 책장을 넘기며 자기만의 환상에 젖기에 이 작품은 너무 묵직하다. 에로티시즘, 그 가운데서도 마조히즘(성적 학대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심리상태)을 이렇게 낱낱이 까발린 작품이 있을까 싶다. 이제야 국내 첫 정식 완역본이 나왔다.
1954년 이 소설이 출간되자 프랑스 문단은 발칵 뒤집혔다. 노골적이다 못해 역겨운 변태적 성행위가 가득한 데다 여성이 주체성을 잃고 성적 노리개처럼 타락하는 과정이 놀랍도록 적나라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익명의 저자에 대한 숱한 추측이 나왔지만 실제 저자인 안 데클로스(1907∼1998·‘폴린 레아주’ ‘도미니크 오리’란 필명을 썼다)는 출간 40년이 지난 1994년 87세의 할머니가 돼서야 정체를 공개했다. 그가 뒤늦게 밝힌 집필 동기도 화제가 됐다.
작품의 여주인공 ‘O’는 그래서 데클로스의 모습과 겹친다. 사랑하는 ‘르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 것. 하지만 작품은 단선적인 순애보에 그치지 않는다. O는 변한다. 르네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남성의 학대와 성적 착취에 놓이면서 그는 점차 깨닫는다. 실은 자신이 이를 즐기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를 원한다는 것을.
‘(성적)고문을 당한다는 생각 자체가 즐겁다가도, 막상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는 그것을 면하기 위해 온 세상을 팔아도 시원찮을 것 같다가, 급기야 고문이 끝나면 모든 걸 견뎌낸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데, 그 기분은 고문이 잔혹하고 길어질수록 배가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은 마조히즘에 대한 분석 외에도 남자가 자신의 애인을 다른 남자와 공유하는 심리, 남자로부터 능욕과 유린을 당하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하는 심리 등이 독특한 시선으로 속속들이 제시된다. 보통의 소설이 섹스를 양념처럼 다루지만 이 작품은 섹스 그 자체에 대한 본질과 심리를 깊숙이, 철저히 파고들어 간다. 처음 몇 장을 넘겼을 때는 가볍게 흥분하게 되지만 책장을 덮었을 때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여성 작가가 약 60년 전에 이런 논쟁적인 작품을 쓰고, 발표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