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세계의 눈/오코노기 마사오]‘日帝 강제징용 배상’ 상반된 반응

입력 | 2012-06-05 03:00:00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징용된 한국인 노동자 9명이 일본기업(미쓰비시중공업과 신닛테쓰)을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 등의 소송에 대해 한국 대법원은 5월 24일 원고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해 심리를 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충격적인 판결 내용이 한국에서는 ‘환호’를 받았고 일본에서는 ‘당혹감’ 속에 받아들여졌다.

일본 측이 당혹스러워한 것은 대법원 판결이 기존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과 대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와 같은 대법원 판결이 한일청구권 협정의 조문 표현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일한 양국 정부가 1965년에 체결한 ‘재산·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의 제2조 1항에는 ‘양 체결국 및 그 국민(기업 등을 포함)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명기돼 있다. 따라서 겐바(玄葉) 외상은 판결 직후 “개인을 포함해 (일한간) 청구권은 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미 해결됐다”고 반론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각종 보도에 따르면 이 점에 관해 한국대법원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의 위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지배의 성격에 관한 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의 청구권 소멸에 관해 일한 양국의 의사가 일치하고 있었다고 볼 만한 충분한 근거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되돌아보면, 합병조약 등 구 조약의 유효성은 청구권 협정 교섭 당시에 격렬한 논쟁의 초점이 됐던 문제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에 대해 일한 기본조약에서는 ‘원래 무효다’라고 표현해, 쌍방이 그것을 편한 대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 해결이 이번에 문제시된 것이므로 일한관계에 체제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청구권 협정 교섭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는 이른바 ‘합법정당론’을 내세워 외교의 일관성을 관철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한국 측의 비분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때문에 1995년 무라야마(村山) 총리담화와 1998년 김대중·오부치(小淵)공동선언에서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가 표명됐던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아 구 조약 체결과 식민지 지배에는 부당행위가 적지 않았지만 구 조약은 그 당시의 제국주의적 국제법 체계 아래에서 합법적으로 체결됐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한국인에게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하지만 아편전쟁과 같은 노골적인 침략에 따라 빼앗긴 홍콩이 구 조약에 규정된 ‘99년 후’에 반환된 것처럼 국제적으로 이 논리가 반드시 소수의견인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은 극복돼야 할 ‘악덕’이다.

나는 국제법학자가 아니다. 국제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국제정치학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이에 따라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포함해 그러한 논쟁의 시비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두 정부가 전혀 다른 법률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가운데 한쪽 입장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일한 관계가 체제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진단이 맞는다면 이를 대충대충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쌍방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철저하게 논쟁하든가, 조약체결 당시에 서명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 따라 국제기관에 ‘조정’을 의뢰할 수밖에 없다.

일한조약 체결 50주년이 되는 2015년까지 쌍방이 솔선해 ‘전후화해위원회’를 설치해 기본 문제의 해결방법에 관해 합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