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
일본 측이 당혹스러워한 것은 대법원 판결이 기존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과 대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와 같은 대법원 판결이 한일청구권 협정의 조문 표현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일한 양국 정부가 1965년에 체결한 ‘재산·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의 제2조 1항에는 ‘양 체결국 및 그 국민(기업 등을 포함)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명기돼 있다. 따라서 겐바(玄葉) 외상은 판결 직후 “개인을 포함해 (일한간) 청구권은 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미 해결됐다”고 반론한 것이다.
되돌아보면, 합병조약 등 구 조약의 유효성은 청구권 협정 교섭 당시에 격렬한 논쟁의 초점이 됐던 문제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에 대해 일한 기본조약에서는 ‘원래 무효다’라고 표현해, 쌍방이 그것을 편한 대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 해결이 이번에 문제시된 것이므로 일한관계에 체제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청구권 협정 교섭 과정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는 이른바 ‘합법정당론’을 내세워 외교의 일관성을 관철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한국 측의 비분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때문에 1995년 무라야마(村山) 총리담화와 1998년 김대중·오부치(小淵)공동선언에서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가 표명됐던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아 구 조약 체결과 식민지 지배에는 부당행위가 적지 않았지만 구 조약은 그 당시의 제국주의적 국제법 체계 아래에서 합법적으로 체결됐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한국인에게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하지만 아편전쟁과 같은 노골적인 침략에 따라 빼앗긴 홍콩이 구 조약에 규정된 ‘99년 후’에 반환된 것처럼 국제적으로 이 논리가 반드시 소수의견인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은 극복돼야 할 ‘악덕’이다.
또 일한 관계가 체제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진단이 맞는다면 이를 대충대충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쌍방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철저하게 논쟁하든가, 조약체결 당시에 서명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 따라 국제기관에 ‘조정’을 의뢰할 수밖에 없다.
일한조약 체결 50주년이 되는 2015년까지 쌍방이 솔선해 ‘전후화해위원회’를 설치해 기본 문제의 해결방법에 관해 합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오코노기 마사오 규슈대 특임교수 겸 동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