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과부들’ ★★★★
국내 초연 중인 아리엘 도르프만 원작의 ‘과부들’은 남미를 무대로 하지만 소포클레스의 희랍비극 ‘안티고네’와 차범석의 ‘산불’을 연상시킨다. 군부독재 아래 실종된 아버지와 남편, 아들들의 이름을 가슴에 묻고 살던 강변 마을 과부들은 강물에 떠내려온 시체로 인해 벌거벗은 폭력에 맞서는 들불이 된다. 극단 백수광부 제공
1일 개막한 극단 백수광부의 연극 ‘과부들’(연출 이성열)은 1970년대 남미 칠레를 무대로 한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우리 현대사와도 무관치 않다. 과부촌은 6·25전쟁을 무대로 한 차범석의 희곡 ‘산불’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을 앗아간 실종, 고문과 의문사는 20여 년 전까지 한국에서도 익숙했던 단어들이다.
국내 초연인 이 작품의 극작가는 ‘죽음과 소녀’로 알려진 칠레 아리엘 도르프만(70)이다. ‘산불’을 개작한 뮤지컬 ‘댄싱 섀도우’의 극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칠레 아옌데 정부 시절 대통령문화특보로 있다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오랜 세월 망명생활을 했다. 해외를 떠돌던 그에게 밤낮으로 강가에 앉아 실종된 아버지, 남편, 자식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늙은 여인의 영상이 떠올랐다. 하룻밤 만에 시로 완성한 그 여인의 이미지는 소설(1983년)과 희곡(1997년)으로 발효됐다.
연극 속 소피아(예수정)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헤카베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합쳐놓은 듯하다. 그는 트로이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헤카베의 절규를 침묵으로 대신한 채 집안 남자들의 귀환을 기다린다. 겉보기엔 새로 부임한 대위가 “여러분의 슬픔과 외로움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약속의 전제조건으로 내건 “얌전히 지내는 것”에 부합한다. 소피아는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릴 뿐.
상황은 강가에 신원미상의 남자 시체가 떠내려오면서 바뀐다. 소피아는 그 시체가 부친의 시체라고 주장하면서 장례 허가를 요청한다. 중위는 이를 허가할 경우 누가 그를 죽였느냐는 책임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해 독단으로 시체를 불태운다. 하지만 또 다른 시체가 떠내려오면서 마을 전체가 동요한다.
군인들은 그 시체가 ‘아무도 될 수 없다’는 모호함으로 문제를 돌파하려 한다. 하지만 과부들은 그 시체가 실종된 마을 남자 ‘누구도 될 수 있다’는 애매함으로 맞선다. 마을 과부 36명 모두가 시체의 연고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군인=남자’가 아군과 적군에 대한 분별력으로 무장해 있다면 ‘과부=여자’는 나와 너, 생과 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동화력의 힘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소피아가 있다.
소피아는 국가반역자란 낙인이 찍힌 오빠의 시체를 매장할 신성한 의무를 관철하기 위해 국가권력의 합리성에 맞선 안티고네의 현현이다. 그를 어떻게든 설복하려다 중위를 능가하는 괴물로 변해가는 대위는 안티고네로 인해 파멸한 크레온 왕의 현대적 변주다.
극의 흐름에 따라 잔잔해졌다가 부풀어 오르는 강물의 흐름을 바위 2개 사이의 굽이치는 공간과 음향으로 표현해낸 무대연출과 비장한 선율에서 남미풍 무곡으로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음악이 가슴을 파고든다. 소피아와 그 손자 알렉시스(홍시로)의 가슴 아픈 이별 장면에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 i : : 10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2만∼5만 원. 02-813-167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