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흔히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데 내가 평소와 다르게 더 다정하게 굴면 어머니와의 이별이 더 빨리 다가올 것만 같아 두려운 것도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문제에서 자기만은 예외이기를 바란다. 나도 다르지 않아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우리 엄마는 달라. 이겨내실 거야”라고 했고, 재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난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데 너무 늦었고 그건 참으로 사무치는 경험이었다.
그것이 병이 되었는지 그 후로 내 아이들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한다.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도 통화를 할 때도 마지막엔 꼭 “사랑한다”고 덧붙인다. 다 큰 아이들도 그렇게 해주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강아지조차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하면 순간적으로 표정이 밝아지곤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은사님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좋은 아버지도 좋은 남편도 아니었지만 좋은 할아버지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언젠가 댁을 방문했을 때 일로 바쁜 딸을 대신해 외손자를 챙겨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적도 있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식탁에서 외손자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말하면 그걸 가지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토론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뒤늦게 주역을 공부하느라 한자를 익히기 위해 명심보감을 다시 원전으로 읽으면서 그 주옥같은 문장들이 새삼 마음을 친 적이 있다. 그때 꿈이 나중에 손자 손녀와 명심보감이며 채근담 같은 고전을 같이 읽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피곤해서 요약을 해주거나 중간은 생략하고 처음과 끝만 읽어주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왜 이렇게 얘기가 짧아?” 하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이제 할머니가 되면 길게 시간을 두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 밖에도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이지 아주 잠깐이라도 일 걱정 안하고 햇살 좋고 바람 시원한 툇마루에서 군고구마 먹어가며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도 싶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물론 우리는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알지 못한다. 1분 후에 올지, 1년 후에 올지 알 수 없는 그 죽음 앞에서 그래도 꼭 하나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들로 인해 내 인생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고 속삭여 준다면 그것으로 내 인생의 존재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양창순 대인관계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