富에는 온갖 인연 얽히고설켜 재앙 따라와
제갈공명은 초야에서 책을 읽다가 유비를 만나 세상으로 나왔다. 이후 얻지 못할 것이 없고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는 지위에 올랐건만 죽을 때까지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노년에 황제에게 “성도에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지 15경이 있어 자손들이 먹고 입을 여유가 있습니다. 신이 죽는 날에 곳간에 남는 곡식이 없고, 창고에 남은 재물이 없도록 해서 폐하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죽었을 때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소학’)
두 개의 일화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부는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부로 권세를 휘두르면 반드시 재앙이 함께 따라온다는 것. 이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이치에 관한 것이다. 즉 부에는 인간 만사의 온갖 인연이 얽히고설켜 있다. 거기에 탐착한다는 건 실로 위태로울뿐더러 참 ‘후진’ 인생이다. 그러니 이를 자손에게 물려준다는 건 더욱 위험하다. 변승업은 그 이치를 알았기에 재산을 흩어버렸고 제갈공명은 아예 재물을 축적하지 않았다.
세상이 너무 험악해서 불안하다고? 그렇다면 내 자식 말고 남의 자식들, 곧 이웃의 청년들에게 ‘밥과 공부’를 제공하라. 소위 말하는 공덕을 쌓으라. 그러면 내 자식도 거리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겠는가. 이것이 부의 사회적 순환이다. 이 말을 할 때 다들 법과 제도, 기타 시스템을 떠올리겠지만, 법과 제도를 통한 순환에는 한계가 있다. 일단 거금이 아니면 그런 루트를 활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막상 돈을 모아 거액의 기부를 하게 되면 대개 그걸 유지하느라 기진맥진하게 된다. 말하자면 주는 이도, 받는 이도 행복하지 않은 ‘이중적 소외’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액수에 상관없이 각자 나름대로 순환의 지혜를 창안하는 게 중요하다. 부귀는 유한하지만 지혜는 무궁하다. 전자는 모욕감을 안겨 주지만 후자는 자존감을 준다. 고로 지혜보다 더 위대한 유산은 없다. 변승업이 그랬고, 또 제갈공명이 그랬던 것처럼!
고미숙 고전평론가